2. 봉건몽골의 계속되는 침략을 쳐물리친 인민들의 투쟁

 

△ 1231년 봉건몽골의 침략을 쳐물리친 후 나라의 형편

봉건몽골침략군은 《화의》를 맺고 쫓겨갔으나 그후에도 침략의 야망을 이루어보려고 갖은 발악을 다하였다.

몽골침략군은 1차침략에서 패한 이후에도 부당한 내정간섭을 일삼으면서 재침기도를 더욱 로골화하였다.

1232년 3월 몽골침략군은 농사지을 인민들과 수공업자, 왕족 및 관료들의 자식을 뽑아보낼것과 수달피 1 000장을 요구하는 등 략탈적이며 황당한 요구를 제기하여왔다. 또한 《사신》 또는 《다로가치》라는 《감독관》들을 파견하여 고려의 내정에 공개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몽골침략자들에 대한 인민들의 투쟁이 고조되였으며 그 과정에 수십명의 다로가치들이 처단되였다.

극도로 첨예해지는 정세로 하여 모대기던 고려봉건통치배들은 1232년 6월 최이의 주장에 따라 강화도에로 수도를 옮길것을 결정하였다.

고려봉건정부는 몽골사신을 억류하고 다로가치들을 처단한 다음 1232년 7월 초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이것을 력사에서는 《강화도천도》라고 부른다.

봉건통치배들이 갑자기 강화도로 들어간것은 바다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몽골침략군의 약점을 타산한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인민들이야 어떻게되던지 제놈들만 살아 안전하게 정권을 유지하려는 의도로부터 나온것이였다. 그러기에 통치배들은 서둘러 강화도로 옮겨앉으면서도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대책은 아무것도 세우지 않고 강화도에 궁궐과 관청을 새로 짓고 2중성벽을 든든히 쌓아 섬을 견고한 요새로 전변시켰으며 1 000여척의 함선과 수만명의 군대로 섬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의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은 목숨을 내대고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지켜 결사적으로 싸웠다.

왕과 최이를 비롯한 통치배들은 강화도로 피신했지만 관청의 중이였던 리통을 비롯한 개경의 노비들과 인민들은 개경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에 일떠섰다.

외적보다 국내인민들의 계급투쟁을 더 두려워한 봉건통치배들이 관군을 내몰아 리통을 비롯한 애국용사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범죄와 반역행위로 인민들의 투쟁은 실패를 보게 되였다.

△ 봉건몽골군의 2차침입과 그 격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원쑤앞에 굴할줄 모르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인민이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갈림길에 놓인 준엄한 시기 봉건통치배들은 겹겹으로 쌓은 강화도의 성안에서 가병들을 거느리고 안일부화한 생활을 일삼고있었다.

이러한 때 봉건몽골침략자들의 고려에 대한 재침략이 시작되였는데 고려인민들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섰다.

몽골침략자들은 1232년 8월부터 1259년《화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5차례에 걸쳐 련이어 공격해왔다.

1232년 8월 살례탑이 거느린 몽골침략군이 먼저 압록강을 건너 고려땅에 밀려들었다. 침략자들은 속전속결을 꾀하면서 도중전투를 피하여 우회하면서 청천강을 건너 개경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개경에 남아있던 수천명의 군대와 인민들은 적들과 용감히 싸워 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개경군민들의 용감한 투쟁에 의하여 함선을 만들어 강화도를 공격하려던 적들의 기도는 파단되고말았다. 이리하여 침략군의 우두머리 살례탑은 개경을 점령하고 강화도로 들어가려던 침략기도를 버리고 계속 남쪽으로 침입하였다.

적들이 한양성을 강점하고 이해 11월 광주성으로 달려들자 광주성인민들은 고을원 기세화의 지휘밑에 용감히 싸워 적들을 쳐부시였다. 광주성인민들의 용감한 항전은 이해 12월 중순 침략군이 물러갈 때까지 줄기차게 벌어졌다.

광주성에서 큰 타격을 받은 침략군의 우두머리 살례탑은 주력을 분산시켜 그 일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기여들었다.

몽골침략군이 이해 12월에 처인성(경기도 룡인군)으로 달려들자 이곳 인민들은 한결같이 적들과의 싸움에 떨쳐나섰다. 처인은 자그마한 부곡으로서 그 성안에는 주로 부곡민들로 이루어진 얼마 안되는 병력이 있었다. 침략군은 그 성을 단번에 점령하려고 덤벼들었다.

처인성안의 군민들은 신심있게 적들을 맞받아 과감히 싸웠다.

 

 

 

처인성전투(상상도)

 

그때 성안에  있던 중 김윤후는 적정을 보다가 침략군우두머리 살례탑을 단 한대의 화살로 쏘아죽이였다.

처인성군민은 우두머리를 잃고 갈팡질팡하는 침략군에게 돌격전으로 무리죽음을 안기고 수많은 적들을 포로하였다. 살아남은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산지사방으로 도망해버렸다.

이렇게 몽골침략군의 2차침입을 반대하는 싸움도 애국적인민들의 용감한 투쟁에 의하여 고려인민들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 봉건몽골군의 3차침입과 그 격퇴

고려에 대한 2차침입에서도 실패한 봉건몽골침략자들은 고려왕을 강화도에서 끌어내여 억류한 다음 그를 미끼삼아 고려를 완전히 정복하려는 간교한 술책밑에 1233년 4월 고종에게 륙지로 나와 몽골을 방문하라는 이른바 《출륙천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정부의 거절로 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된 몽골침략자들은 또다시 고려에 침입하여왔다.

고려인민들은 1235년 7월부터 시작된 몽골침략군의 3차침입도 성과적으로 격퇴하였다.

이때 죽주성(경기도 안성군)인민들이 특히 잘 싸워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해 9월 초 죽주성의 군민들은 성을 에워싸고 《항복》을 강요해나서는 적들에게 성문을 열고 나가 반돌격전을 벌려 타격을 주었으며 적의 포에 맞아 성문들이 부서진 위급한 정황하에서도 용감히 싸워 적들을 기어이 격퇴해버렸다. 실로 죽주성방어전투의 승리는 고려인민들의 수성전의 우월성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 봉건몽골군의 4차, 5차 침입과 그 격퇴

고려인민들은 1247년 7월과 1253년 7월 몽골침략자들의 4차, 5차 침입도 과감히 물리치고 승리를 이룩하였다.

몽골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에서 충주성인민들의 투쟁은 특출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1253년 7월 적들의 5차침입때 침략군의 우두머리인 야굴은 국내깊이 기여들어 충주성을 포위공격하였다.

충주성인민들은 70여일간의 공방전에서 침략자들에게 호된 타격을 주었으며 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완전포위상태에서 두달이상 전투가 계속되는 과정에는 여러가지 난관이 조성되였다. 특히 식량이 떨어져 산성방어에서 가장 어려운 고비를 겪게 되였을 때 김윤후는 보관되여있던 노비문서들을 인민들앞에서 불살라버리면서 모두가 최후돌격전에 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은 노비를 비롯한 인민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으며 그들은 성문을 열고 나가 적들에게 드세찬 반격을 들이대였다.

이리하여 충주성에 대한 봉건몽골침략자들의 침공은 좌절되고 충주이남지역에로의 진출계획은 파탄되고말았다.

이렇게 인민들이 피어린 항전을 하고있을 때 봉건통치배들은 추악한 권력다툼만 일삼았다.

1258년 3월 강화도안에서 무관 김인준, 문관 류경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최의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고려정부안에서 통치배들의 알륵과 대립이 로골화되고있을 때 지방봉건관료들속에서는 투항분자들이 생겨났다. 1258년 12월 화주(금야)일대의 토호출신들인 조휘, 탁청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인 다음 몽골침략자들에게 투항하였다. 침략자들은 이 기회를 타서 철령이북의 땅을 가로타고 《쌍성총관부》라는 제놈들의 지방행정기관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동북지방의 적지 않은 지역이 몽골침략자들의 강점밑에 놓이게 되였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급변하는 정세에 당황한 봉건통치배들은 점차 적들과 화의를 맺는 길로 나갔다.

그후 강화교섭이 빨리 진척되여 1259년 3월 고려태자의 몽골방문협약이 맺어지고 몽골침략자들은 물러갔으며 고려태자 전(후의 원종)은 몽골의 흘필렬(구비라이, 후에 원세조)을 만나 《화의》를 맺었다.

《화의》는 봉건몽골이 고려의 주권과 령토를 기본상 인정하는 원칙에서 이루어졌다. 왕태자 전은 다음해 초에 《화의》를 결속짓고 국왕 고종이 죽었다는 련락을 받자 귀국하여 왕위(원종)에 올랐다.

고려와 봉건몽골과의 《화의》는 30여년간 진행된 고려인민의 피어린 투쟁의 승리였다.

흘필렬은 즉위직후인 1260년 4월 고려에 보내온 국서에서 고려의 왕권을 인정하며 붙잡아간 고려사람들을 돌려보내는 동시에 고려로부터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에서 략탈한자들을 법에 따라 처벌할것 등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당시 몽골침략사상 전례없는 일이였다. 포악한 몽골침략자들은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상대측의 주권과 국왕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에 대해서만은 그 주권과 국왕의 엄연한 존재를 인정하고 평화적국교관계를 맺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봉건몽골의 대규모침략을 격퇴하고 민족의 존엄과 나라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피흘려싸운 고려인민의 희생적인 투쟁의 결과였다.

두나라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진 후에도 고려인민들은 몽골침략자들과 그와 야합한 국내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여 과감한 투쟁을 벌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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