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력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건축가 김정희

김정희선생(1921.7.9-1975.11.2)은 당의 주체적건축미학사상을 충직하게 받들어 혁명의 수도 평양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계획설계하고 수많은 기념비적창조물들을 일떠세우는데 기여한 우리 나라의 이름난 건축가이다. 평안북도 운전군 옥야리에서 출생한 그는 건축가가 될 꿈을 안고 외국에서 공부도 하였다.

하지만 불우한 식민지민족의 운명은 그의 소중한 희망을 꽃피워줄수 없었다. 공화국력사에 애국의 자욱을 남긴 수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김정희선생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참답게 복무하는 혁명적지식인으로서의 값높은 삶을 받아안을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시기 20대의 청년이였던 그를 북조선건축가동맹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일하도록 내세워주시였다. 그리고 해방후 외국으로 가는 첫 류학생명단에 그의 이름을 넣도록 해주시였다. 력사적인 외국방문시에는 그를 또다시 만나주시고 추워할세라 자신께서 입고계시던 사연깊은 외투까지 안겨주시였다.

김정희선생의 첫 작품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평양시복구건설총계획도이다.

가렬한 전쟁이 한창이던 주체40(1951)년 1월 전선탄원의 열망을 안고 조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시복구건설총계획도를 작성할데 대한 영예로운 임무를 맡겨주시였다. 손수 작전대우에 커다란 평양시지도를 펼쳐놓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작전도에 화살표를 그으시던 색연필로 여러번 찍으신 점들과 긋고그으신 선들, 갖가지 모양의 표식들을 하나하나 짚어가시면서 중심부를 비롯한 도시전반을 설계하는데서 나서는 원칙적문제들에 대해서와 도로망, 살림집, 공공건물, 산업건물들의 위치와 크기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불비쏟아지던 전화의 그 나날 최고사령부에서는 우리 조국의 수도 평양시가 전쟁전보다 더욱 웅장화려한 도시로 설계되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태여나게 되였다.

김정희선생이 마침내 평양시복구건설총계획도를 작성하였을 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러차례나 수정방향을 주시고 그 완성을 위하여 때없이 적들의 공습이 감행되는 평양시를 친히 돌아보기도 하시였다.

강철의 령장의 손길아래서 이렇게 완성된 평양시복구건설총계획도는 싸우는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커다란 신심과 용맹을 안겨주었으며 1952년 어느 한 나라에서 진행된 세계건축가들의 회의에까지 출품되여 영웅조선의 필승의 기상을 힘있게 과시하였다.

김정희선생은 전후에도 위대한 수령님의 각별한 믿음과 보살피심속에 건설대학(당시) 초대학장, 국가건설위원회 부위원장, 내각 설계총국장, 내각 도시설계지도국장 등의 중임을 맡아 주체적이며 인민적인 당의 건설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우리 당이 조립식건설정책을 내놓았을 때에는 그 관철을 위한 투쟁의 앞장에 서서 종파놈들의 헛나발질을 짓뭉개버리였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사회주의문화농촌건설을 구상하시면 숙천군과 청산리, 룡림리, 오국리 등 농촌지역들을 메주밟듯 다니면서 맡은 설계과업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안주시와 남청진도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받들고 김정희선생이 계획설계하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 한 공사장에서 뜻밖의 사고로 사망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못내 애석해하시면서 참으로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김정희동무는 내가 안주에 갈 때면 언제나 길가에 나와 지켜서있군 하였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은정속에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였다.

그를 원형으로 한 예술영화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애지중지 아끼시던 건축가를 추억하시며 김정희동무는 건설에서 영웅이며 박사였다고 과분한 치하를 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실 때에는 능력있는 설계가들과 지도일군들이 많았다고 하시면서 여러차례나 그의 공적을 헤아려주시였다.

공화국력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건축가 김정희선생은 그가 설계한 기념비적창조물들과 더불어 오늘도 우리 당과 인민의 기억속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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