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1833-1906) ​

조선봉건왕조말기의 애국적유생, 반일의병장.

자는 찬겸, 호는 면암, 본은 경주이다.

일찌기 위정척사론의 대표적인물인 리항로(1792-1868)의 영향을 받았다. 1855년(철종 6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리조 정랑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당시의 집권자였던 대원군(1820-1898)의 서원철페와 경복궁재건공사추진, 호포제도의 실시 등을 반대하는 상소를 하여 탄핵을 받고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대원군이 정권에서 밀려난 후 귀양살이에서 벗어나 고향에서 교육사업에 힘썼다. 1876년 봉건통치배들이 일본침략자들에게 굴복하여 불평등적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자 이를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다시 귀양살이를 하였다. 조선봉건정부는 사회적으로 신망이 있던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여러번 벼슬을 주었으나 그때마다 모두 거절하였다. 일제에 의하여 1905년에 침략적인 《을사5조약》이 사기적인 방법으로 날조되자 그는 8도에 반일의병투쟁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1906년 5월 전라도에서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였다. 그의 지휘밑에 반일의병들은 태인, 순창, 담양, 곡성 등지에서 적통치기관들을 들부시는 등 맹렬한 활동을 벌리였다. 이해 6월 11일 순창전투에서 실패하여 일제침략자들에게 체포된후 쯔시마에서 류배살이를 하게 되였다. 그는 류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것이라 하여 일체 거절하고 단식을 계속하면서 생애의 마지막까지 애국적지조를 꿋꿋이 지키다가 희생되였다. 봉건유생인 그가 발휘한 애국정신은 외래침략으로부터 봉건제도를 옹호보위하려는데서 나온것이였으나 침략자들과 맞서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그의 투쟁정신은 당시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에 고무적영향을 주었다. 저서로서 《면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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