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널리 알려진 고구려산성​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유적과 유물은 선조들이 어떤 문화를 창조하고 어떻게 생활하였으며 어떠한 길을 걸어 발전하여왔는가 하는것을 보여주는 실물자료입니다.》

고구려사람들이 창조한 많은 민족문화유산가운데서 산성은 특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고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지닌 고구려사람들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조국을 방위하는것을 가장 영예롭고 신성한 의무로 여기였기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산성을 쌓아 적들의 침략을 물리쳤다.

 

《자치통감》과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사람들은 산에 성을 쌓고있기때문에 외적이 공격하여도 쉽게 함락시킬수 없다는 내용이 서술되여있다. 16-17세기의 이름있는 봉건관료였던 류성룡도 우리 나라는 나라를 보존하고 외적을 방어하는데 모두 산성을 리용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고을들에서 산의 지형이 험한 모든 곳에는 옛성터가 없는 곳이 없다고 하면서 이것은 삼국이래 고려에 이르기까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였다고 자기의 문집《서애선생문집》에서 서술하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고구려산성은 무엇보다먼저 그것이 량적으로 대단히 많은것이다.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외적과 치렬한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으므로 나라의 방위에 깊은 관심을 돌렸으며 그 과정에 많은 성을 쌓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성에 관한 기사가 158개소에 나오는데 그가운데서 중복되여나오는 54개의 성을 빼면 그 수는 104개이다. 이밖에《료서10성》, 《백제10성》, 《국남7성》, 《국동6성》, 《부여천의 40여성》, 《대곡, 한성 등 12성》의 기사는 그 개별적인 성들의 이름은 알수 없으나 다른 성의 이름과 중복되지 않는다고 볼수 있으므로 그 수 85개를 합치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성의 총수는 189개로 된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고구려성가운에서 새로 보이는 65개의 성을 합치면 고구려에는 255개의 성이 있었던것으로 된다.

 

고구려성이라고 하면 고구려사람들이 처음으로 쌓았거나 다른 종족이나 나라들이 쌓은것을 고쳐쌓은것도 있고 새로 확장한 지역에 있는 성들을 그대로 리용한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령역안에 있었던 성들을 모두 고구려의 성으로 인정하고 고구려성의 수를 약 1 000개로 보는 설도 있다.

이러한 견해들은 결국 고구려에 수많은 성이 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고구려의 성들이 많은 경우 산성을 념두에 둔다는것은 잘 알려져있다.

고구려사람들이 산성을 기본으로 쌓은것은 그것이 산이 많은 우리 나라의 자연지리적조건에 맞는 가장 합리적인 방어수단이였기때문이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 성을 쌓고 외적을 쳐물리치고 나라를 튼튼히 지켜낼수 있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고구려산성은 다음으로 그것이 그 어떤 외적의 침공도 물리칠수 있게 튼튼히 꾸려진 난공불락의 요새라는것이다.

어떤 지형에 산성을 쌓는가에 따라 성의 방어력이 크게 좌우되게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산성들은 대부분이 예로부터 《고로봉》이라고 부르는 지형에 쌓았다.

 

고로봉이라고 하는것은 4면이 다 봉우리로 둘러막히고 가운데골짜기를 낀 산의 지형을 말한다. 고로봉지형에 쌓은 산성은 성안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고 장기전에도 얼마든지 대처할수 있으며 적들이 성을 공격하는데는 불리하고 방어하는데는 유리한것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리로운 점을 가지고있다. 사람들은 산성을 쌓는데 적합한 지형을 고로봉, 산봉, 사모봉, 마안봉지형이라고 하면서 그가운데서 고로봉지형이 가장 좋은것으로 보았다.(《민보집실》보제 제2)

 

고구려가 이러한 지형에 산성을 쌓게 된것은 령토가 넓고 산악지대가 많은 자연지리적조건과 강대한 병력으로 자주 침입하여오는 적들과 큰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당시의 형편에서 그에 맞는 방어시설을 쌓지 않으면 안되였기때문이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산성을 쌓을 때 기초를 든든하게 하는것을 비롯하여 성벽을 견고하게 하고 방어력을 높이는데 많은 주의를 돌렸다. 특히 성벽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높은 축성기술을 발휘하였다.

 

고구려산성의 성벽에서 특징적인것은 돌로 성벽을 쌓는 경우 성돌들을 일정한 형태로 다듬어 쌓았는데 특히 성벽의 앞면에는 4각추형태로 가공한 돌로 쓴것이다. 그러한것은 오녀산성과 롱오리산성, 태백산성 등 여러 산성들에서 찾아볼수 있다. 4각추형태의 돌로 성벽을 쌓으면 성벽의 견고성을 보장하는데 매우 유리하다. 4각추형태의 돌로 성벽을 쌓은것은 당시 고구려에서만 찾아볼수 있는것이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산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여러가지 성벽시설물들을 창안도입하였다. 그 대표적인것이 옹성과 치이다.

 

옹성은 성문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성문을 앞에서 가로막아 성벽을 쌓은것이다. 성문은 성곽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의 하나이며 그 방어에 가장 깊은 관심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는 시설이다. 그러므로 고구려사람들은 건국 첫시기부터 산성을 쌓으면서 성문방어에 깊은 관심을 돌렸으며 옹성과 같은 성문방어시설을 창안하였다.

 

고구려성곽의 옹성에는 《ㄱ》형과 반원형 등 여러가지 형식이 있었다.

옹성은 고구려사람들이 창안한 성문방어시설이다. 당시 다른 나라의 성곽들에서는 옹성을 찾아볼수 없다. 후세 우리 나라 성곽들에 옹성이 도입되고 또 이웃나라들의 성곽에도 그런것들이 생긴것은 고구려성곽의 영향이라고 할수 있다.

 

치는 성곽에 내쌓은 방어시설로서 보통 성벽이 직선으로 되여있는 곳에 설치되여 성벽에 다가오는 적들을 정면과 좌우에서 소멸하기 위한것이다.

 

따라서 성벽에 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성의 방어력을 높이게 된다.

이른시기의 고구려산성들에 치가 설치되여있는것은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치시설이 도입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실례로 흑구산성의 치를 통하여 알수 있다.

 

산성자산성과 연주성, 성산산성을 비롯하여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많은 고구려산성들에서 치가 확인되였다. 그리고 수양산성, 태백산성, 황주성, 백마산성, 통주성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서북지방의 고구려산성들가운데서도 치가 있는 산성들이 많이 발견되였는데 특히 대성산성에서는 모두 65개의 치가 확인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당시 주변나라들의 성곽들에서는 치를 찾아볼수 없고 퍽 후에야 치가 출현하였다는것은 그것이 고구려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창안한 창조물이라는것을 보여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고구려산성은 다음으로 산성들이 고립된 독립적인 방어시설인것이 아니라 서로 련관되여 하나의 방어체계를 이룬것이다.

고구려의 성방어체계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수 있는데 그것은 전연방어체계와 종심방어체계 및 위성방어체계이다.

전연방어체계는 국경선부근에 있는 성방어체계이고 종심방어체계는 수도를 통하는 중요한 통로에 형성되여있는 성방어체계이며 위성방어체계는 중요한 정치적중심지에 있는 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성들을 배치하여 중심성의 방위를 강화하는 성방어체계라고 말할수 있다.

 

전연방어체계의 대표적인 실례는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이였던 료하류역의 성들을 들수 있다. 료하계선에는 료동성, 백암성, 건안성, 개모성, 비사성 등 많은 성들이 있는데 이런 성들이 서로 련결되여 전연방어체계를 이루고있었다는것은 이미 론의되였다.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으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와 세번째 수도였던 평양성의 북쪽으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에는 종심방어체계가 형성되여있었다. 국내성서북쪽의 종심방어체계에는 고이산성, 철배산성, 패왕조산성, 고려성자성, 목기성, 살이허산성 등 많은 성들이 속하여있었고 평양성이북지역의 종심성방어체계에는 봉황성, 구련성, 백마산성, 걸망산성, 룡골산성, 통주성, 릉한산성, 청룡산성 등 많은 성들이 속하여있었다.

 

고구려의 이러한 성방어체계들은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실지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612년 수나라 300만대군의 침공을 쳐물리친 전쟁은 고구려의 성방어체계가 얼마나 위력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수나라의 300만대군이 국경을 침입하자 고구려는 료하계선의 성방어체계에 의거하여 그것을 격파하였다. 료하계선의 전연방어체계에서 료동성은 가장 중요한 기둥성이였다. 그러므로 침략군이 공격도 료동성에 집중되였다. 침략자들은 수십만의 대군을 집중하여 료동성을 수십겹으로 둘러싸고 여러가지 공성무기들을 쓰면서 100여일간이나 맹공격을 련속 들이댔으나 차례진것은 수치스러운 패배뿐이였다. 수나라 양제는 이 전연방어체계를 돌파할 승산이 없다는것을 깨닫고 별도로 30만 5천여명의 침략군부대를 편성하여가지고 전선을 넘어 침입하였다. 고구려는 이에 대처하여 종심방어체계를 리용하는 전술을 썼다. 침략군의 별동대가 침입한 경로는 대체로 안시성부근을 통과한 다음 백석산을 거쳐 오골성을 지나 봉황성으로 접근하는 길이였는데 이 통로에는 오골성밖에도 여러개의 고구려성들이 종심방어체계를 이루고있었다. 적들은 당시 고구려의 북쪽 부수도 부근까지 접근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유인전술에 걸려 결국 살수전투에서 전멸되고말았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산성은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에 수많이 분포되였을뿐아니라 적들의 그 어떤 침공도 물리칠수 있는 튼튼한 요새인것으로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런 의미에서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라고 말할수 있다.

우리 겨레모두는 력사유적과 유물에 대한 발굴과 연구를 심화시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더욱 빛내여나가야 할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김경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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