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가들의 결정적역할에 의한 국제련합군편성과 력사적의의 1)

1. 서 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42년 7월에 우리는 쏘련,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조선혁명의 주체적력량을 백방으로 강화해나가면서 국제반제력량과의 공동투쟁을 통하여 일제의 격멸과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하였습니다.》

1940년대에 이르러 항일혁명투쟁은 조국해방위업수행에서 결정적국면을 열어놓을수 있는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섰다.

이 시기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에서 중요한 내용의 하나로 된것은 주체31(1942)년 여름부터 쏘련경내에서 중국, 쏘련의 전우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일제를 최종적으로 격멸하기 위한 정치군사적준비를 백방으로 강화해나간것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쏘련, 중국의 무장력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편성하고 공동투쟁을 벌린것은 조선혁명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의미하는것이였다고 평가할수 있다.

조선의 혁명가들은 세 나라 무장력의 국제적련합을 가장 적중한 시기에 가장 리상적으로 실현하는데서 나서는 복잡한 문제들을 용의주도하게 해결해나감으로써 일제의 격멸과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이 글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쏘련원동군의 일부 부대들로 이루어진 국제련합군편성에서 조선혁명가들이 논 역할과 국제련합군편성이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 해명하려고 한다.

 

2. 본 론

 

2. 1. 국제련합군편성의 력사적필연성

 

매개 나라 혁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체의 혁명력량을 튼튼히 꾸리는 기초우에서 국제혁명력량과 굳게 단결하며 유리한 국제적환경을 주동적으로 마련하여야 한다.

 

조, 중, 쏘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실현하는것은 우선 일제와의 최후결전을 앞두고 조선혁명의 주체적력량을 강화하고 유리한 국제적환경을 마련하는데서 반드시 중시해야 할 전략적인 문제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이 결정적인 최후공격작전을 위해 대오를 정비하고 핵심을 보존육성해가면서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어나가던 이 시기 국제정세발전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급속히 확대되고있는 가운데 1941년 6월 쏘도전쟁이 발발하였으며 1941년 12월에는 일제침략군이 하와이에 있던 미군기지 진주만을 불의에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은 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강점한 일제가 전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기어이 실현해보려는 책동이 극도에 이르렀다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결속짓지 못한 상태에서 또 하나의 전쟁을 도발한것은 무모한 도박에 불과한것으로서 조, 중 두 나라 혁명가들에게 최후결전의 시기를 앞당길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주고있었다.

이미 앞선 침략전쟁들에서 수많은 인적 및 물질적손실을 당한 일제는 이런 큰 전쟁을 동시에 치를만 한 국력이 없었다.

당시 일제는 자기의 동원능력을 최대한 다 발휘한다 하여도 침략전쟁확대에 필요한 병력을 보장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9.18사변후부터 7.7사변까지의 기간에 일제는 만주에서만도 근 20만에 달하는 병력의 손실을 보았다. 중일전선에서는 해마다 큰 손실을 보고있었는데 이미 최정예부대의 반수이상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데 일제의 후비병력원천은 이미 고갈되여있는 형편이여서 그것을 보충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일제가 아시아전역에로 확대되는 전선의 병력수요를 도저히 충족시킬수 없으리라는것은 명백하였다.

게다가 일제는 현대전에 대량적으로 요구되는 중요전략물자를 수입에 의존하고있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있었으며 보유하고있는 전략물자의 예비도 한계점에 이르고있었다. 간삼봉전투시기에 일제가 사용한 탄알들이 1920년대에 생산한것들이였지만 소할바령회의직전에는 1939년 이후에 생산한것들을 쓰고있었던 사실은 탄약의 예비도 바닥이 났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군수물자보급면에서의 일제의 난관은 앞으로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화될수록 더욱 커질것이였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남은 국력을 탕진하게 되리라는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였다.

그런데 일제가 세계제패의 야망실현에 미쳐날뛰는것으로 보아 쏘련에 대한 침략전쟁까지 도발할수 있었다.

조성된 정세는 조선의 혁명가들이 조, 중, 쏘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내용으로 하는 폭넓은 공동투쟁단계에로, 국제반제반파쑈투쟁의 거창한 흐름에 합류하는 새로운 공동전선단계로 넘어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위업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종국적으로 괴멸시키기 위한 세계사적과업을 동시에 수행할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조중 두 나라 무장력이 쏘련의 원동에 하나의 기지를 가지고있고 또 쏘련원동군이 익측에 존재하는 조건에서 공동항일의 폭과 심도를 더욱 넓히고 그것을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켜야 하였다.

1941년 3월 중순까지 계속된 하바롭스크회의이후 쏘련측은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에 원동지역에 2개의 기지를 제공해주었다. 하나는 워로쉴로브근처에 있는 남야영이였고 다른 하나는 하바롭스크부근에 설치된 북야영이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기본집단이 동북항일련군의 전우들과 함께 쏘련의 원동에 새로운 림시기지를 꾸린 다음 국내와 만주일대를 드나들면서 소부대활동을 활발히 벌려나가게 된것은 항일혁명의 최후승리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을 보다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킬수 있는 중요한 첫걸음으로 되였다.

 

조, 중, 쏘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실현하는것은 또한 일제와의 전쟁에 박두한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는데서 중시해야 할 전략적인 문제였다.

원래 파쑈도이췰란드와 함께 일본은 쏘련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계한 세계최악의 호전국가였다. 더우기 쏘련과 일본사이에는 로일전쟁당시로부터 력사적으로 형성된 뿌리깊은 모순관계가 있었다. 그 모순관계가 쏘일간의 새로운 전쟁으로 번져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로부터 쏘련은 국가건립의 초기부터 동쪽국경의 안전을 보장하는데 큰 힘을 넣어왔다. 특히 하싼호사건과 할힌골사건을 통하여 일제의 령토팽창야욕과 강도적본성을 다시한번 충분히 엿보게 된 쏘련은 일본이 어느때든지 《북공》을 단행하리라는것을 각오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방도를 각방으로 모색하여왔다.

그러나 1940년대초 쏘련과 일본 두 나라는 자기들의 정치군사적리해관계로부터 즉시적인 충돌을 피하는 방향에서 정치군사적외교를 추진시켰다.

당시 쏘련은 서부국경쪽으로 질풍같이 육박해오는 도이췰란드와의 충돌을 거의 불가피한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도이췰란드가 서쪽에서 쳐들어올 때 일본이 동쪽에서 쳐들어오게 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후과를 가져올수 있었다.

큰 땅덩어리의 한쪽은 유럽에 속해있고 다른 한쪽은 아시아의 넓은 판도를 차지하고있는 쏘련으로서는 그 넓은 국경선의 한쪽만을 지킨다거나 어느 한쪽의 적을 막을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것만으로 국가방위에 완벽을 기할수 없었다.

이로부터 쏘련은 모든 힘을 다하여 어떻게 해서나 도이췰란드와 일본의 동서협격을 피해보려고 하였다. 쏘련은 반공의 돌격대로 등장한 도이췰란드의 침공을 미연에 방지해보려고 여러모로 애를 쓰면서 도이췰란드와의 있을수 있는 전쟁을 피하든가 최소한 지연이라도 시킬 목적으로 1939년에 도이췰란드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런 다음 일본과의 화평을 추구하면서 그들의 침공을 예방하려고 하였다.

이런 맥락속에서 이루어진 일시적인 결과물이 바로 쏘일중립조약의 체결이였다.

이 조약의 목적은 쏘일쌍방이 서로 상대를 견제하자는데 있었다.

그러나 쏘일중립조약이 체결되였다고 해서 쏘일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담보는 없었다.

그리하여 쏘련은 도이췰란드와 힘겨운 전쟁을 진행하면서도 대일전쟁준비를 과제로 제기하고있었다.

대일전쟁준비에서 쏘련이 추구하고있던 가장 중요한 항목중의 하나가 국제항일력량과의 련합을 실현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당시 동방에는 쏘련을 무력으로 도와줄수 있는 동맹국이 없었다.

동방에서 쏘련을 무장으로 도와줄수 있는 존재란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밖에 없었다. 이로부터 쏘련은 동북에서의 항일무장력량을 쏘련원동군의 일익으로 보면서 일단 유사시에는 쏘련원동군무력의 별동대로 삼으려고 하였다.

실지로 국제당과 쏘련은 1939년부터 조선인민혁명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과의 뉴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였다.

1939년말에 국제당이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에 련락원들을 보낸 사실을 두고 일제의 관헌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있다.

《…강덕 6년(1939년) 10월 11일 김일성비가 화룡현 삼도구 서북쪽 침봉밀림속에 있을 때 공비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권총을 휴대한 로씨야인 8명이 조선인통역 두사람과 함께 김일성 찾아와서 중요담화를 했다. 그때 중요간부이외에는 누구도 곁에 접근시키기 않고 약 10일간 머물러있은 다음 김일성비단가운데서 허약자 12명을 데리고 떠나간 사실이 있다. 그 로씨야인은 쏘련에서 련락원으로 온 사람들이라 하며 …상세한것은 명확치 않으나 직접 쏘련에서 중요한 사명을 띠고 련락을 온것이 아닌가고 보아진다.》(훈춘령사 기우찌의 보고, 소화15년(1940년) 7월 26일)

《다음으로 당의 지도에 대한 령도로선문제인바 이것은 작년(1939) 12월 쏘련에서 직접 제1로군에 4명의 련락원을 보내왔는데 그 련락내용과 목적은 아직 전혀 알지 못하고있다. 단지 이러한 사실은 금년(1940) 1월 22일 무송에서 압수한 위증민이 양정우앞으로 보낸 서신속에서 그 점에 대하여 명백하게 쓰고있으며 경로는 돈화에서 대포시하에로 들어오고 다시 량강구를 거쳐 …왔다는것이 분명하다.》(《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동향》《사상월보》 제77호, 사법성 형사국, 소화15년(1940년) 11월)

국제당이 자기들이 주관하는 회의에 조선혁명가들을 초청한것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적의 배후에서 쏘련을 무장으로 지원할수 있으리만큼 강력한 력량으로 자라난 결과였다.

사실 조선혁명은 거의나 국제당의 시야밖에 놓여있었다.

국제당이 안중에 둔것은 중국이나 인디아와 같은 큰 나라들의 혁명이였다.

국제당은 같은 중국혁명인 경우에도 관내의 혁명투쟁에 대해서는 관심을 많이 돌렸지만 동북혁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동북혁명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면 제2로군이나 제3로군에 치중했을뿐이였다. 쏘만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있던 조선인민혁명군이나 남만의 제1로군에는 거의 낯을 돌리지 않았다.

동북혁명이나 조선혁명에 랭담하고 무관심했던 국제당이 1939년에 이르러서는 련락원을 보내여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의 대표를 쏘련에 초청하는 이례적인 조치까지 취한것은 하싼호사건과 할힌골사건때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이 쏘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여 강력한 배후공격작전을 벌리는것을 목격하고 만주빨찌산이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것을 알게 되였기때문이다.

국제당과 쏘련은 1940년에도 조선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에 련락원을 파견하였다.

이것은 1940년대 전반기 일제를 격멸하기 위한 투쟁에서 조, 중, 쏘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실현하는것이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자체를 위해서도 필요할뿐아니라 쏘련의 대일전략과도 일치하는것이라는것을 보여주는것이였다.

이처럼 1940년대 전반기 조, 중, 쏘 세 나라 무장력의 련합을 하루빨리 실현하는것은 쏘도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당시의 급변한 정세속에서 조선과 중국, 쏘련 매개 나라의 민족적리익과 세 나라 혁명의 공동의 리익을 위한 필연적과제로 제기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부교수 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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