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제2장 용단


6


그날은 박순정이 퇴원하는 날이였다.

간호원처녀의 부축을 받으며 병동 앞계단을 내려서던 박순정은 천천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아란 가을하늘에서는 유난히도 밝은 해빛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서북쪽하늘로 줄지어 날으는 기러기떼도 보였다.

병원 앞마당의 은행나무들이 어느새 하나같이 황금빛으로 단장했다.

류달리 아름진 은행나무아래에서 서성거리고있던 리당비서와 해군군관복을 입은 맏손녀사위 그리고 중학생인 막내손녀가 반색을 하면서 박순정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이젠 몸상태가 퍽 좋아지셨습니다.》

《어이구, 리당비서어른도… 시간이 바쁠텐데 뭘 이 먼데까지…》

막내손녀는 벌써부터 박순정의 팔에 매달렸다.

《할머니, 이젠 다 나았나요?》

《그래, 그래. 이젠 하나도 일없다. 이 귀여운것아-》

박순정은 막내손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를 꼭 껴안아주었다.

뒤따라 녀의사의 손을 꼭 잡은 아들과 며느리가 천천히 병동출입문을 나섰다.

《선생님,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녀의사는 웃으며 응대했다.

《수고야 뭐, 사실 인사는 할머니가 받으셔야지요. 얼마나 부지런한지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해서부터는 매일같이 손에 걸레와 밀대를 드시고… 그래서 호실은 내내 모범호실로 불리웠답니다.》

《아마 그랬을겝니다. 우리 어머닌 집에서도 무슨 일이든 손에 잡고있어야 마음이 편해하셨으니까요.》

아들은 이렇게 말하며 건강상태가 몰라보게 좋아진 박순정의 옆모습을 정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일행은 박순정을 부축하여 병동 앞마당에 세워놓은 파아란 소형뻐스에 올랐다.

간호원처녀가 병동으로 뛰여들어가 안고 나온 큰 지함을 뻐스의 뒤쪽에 올려놓았다.

《이건 뭡니까?》

아들이 물었다.

《보약입니다. 경옥고랑 십전대보환이랑… 할머니가 매일 식전에 꼭꼭 잡숫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건 할머니가 머리아플 때 쓰는 약, 요건 심장이 활랑거릴 때 쓰는 약…》

간호원처녀는 비상약품이 들어있는 작은 약함도 내밀었다.

《고맙소, 간호원동무.》

《고맙긴요. 고마운 우리 나라 보건제도의 덕택인걸요.》

처녀는 볼우물을 곱게 팠다.

그가 뻐스에서 내려서자 부르릉- 소리가 났다.

녀의사는 박순정의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할머니, 부디 몸을 잘 돌보세요.》

《알겠소, 알겠소. 선생, 정말 고맙소.》

박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눈굽에 갖다댔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지. 고맙구말구…

그는 차창밖으로 손을 내밀고 바래워주러 나온 의사, 간호원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밖에서도 모두가 뜨겁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높다란 병동의 베란다가 달린 창가들에서도 상체를 내민 환자들이 퇴원하는 박순정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있었다.

병원정문을 벗어난 소형뻐스는 평양시내를 달리다가 남포방향으로 머리를 돌렸다.

단풍든 가로수들이 차창을 스치였다. 저만치 앞쪽에서는 길다란 궤도전차가 멈춰섰는데 거기에서 가을옷차림을 한 활기에 넘친 사람들이 쏟아져내렸다.

소형뻐스안에는 즐거운 기분이 떠돌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물론 조향륜을 잡은 나이 지숙한 운전사도 입이 벙글써해가지고 앞을 주시하고있었다.

그러나 그 시각 좌석에 몸을 깊숙이 박은 박순정의 표정만은 달랐다. 주글주글한 얼굴에서는 현재와 과거를 걷어안고 고패치는 고민의 그림자가 알릴락말락하게 배여있었다.

황선생, 김진희연구사, 녀의사, 간호원처녀… 각이한 초상들이 순정의 눈앞으로 얼핏얼핏 스쳐지났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지. 고마운 사람들이 이들뿐인가. 해방후 고향 강서로 돌아왔을 때 제 혈육처럼 반갑게 맞아주던 면인민위원장아바이, 말없이 힘을 주고 용기를 주던 정대석이, 모범농민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 리당위원장과 관리위원장, 잊지 못할 고향마을사람들과 정다운 편직물생산협동조합의 일군들… 이런 고마운 사람들이 언제 한번 나의 어지러운 과거를 캐묻거나 천시한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물론 제도가 좋아서였다. 좋은 제도가 있고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녀자구실도 못하는 이 병신짝 같은것도 사람대접을 받으며 살아왔다. 오늘은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에다가 끌끌한 손녀사위까지 거느린 대식솔의 할미가 되였다.…

순정의 머리속에서는 전쟁직후 언젠가 면적으로 진행된 소토생산전투총화에서 라지오를 상으로 받아안고 기쁨에 어깨를 떨던 일도 방불히 떠올랐다.

그럼 내가 나라를 위해, 이 좋은 제도를 위해 바친것이 무엇이고 이 고마운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한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난날의 모범농민? 편직물협동조합의 모범로동자? 그것만으로는 너무도 모자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 생각이 너무 쪼물짝하지 않는가.… 가만, 황선생이나 김진희연구사가 왜 나같이 일본군성노예노릇을 하던 늙은이들을 찾아 발이 부르트도록 뛰여다니는가.… 바로 그것때문이다. 그 륙실할 일본쪽발이들이 해방전에 숱한 우리 조선녀성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성노예로 부려먹다가 나중에는 사지판에 내던져버리고도 지금은 뺑덕어미 사발깨고 아닌보살하듯 하기때문이다. 그런데 일본호색광들의 죄행을 제일 잘 알고있는 내가 속에 있는것을 다 꺼내놓지 않고 계속 모르쇠를 부려야 하는가. 이렇게 난 병치료를 다했으니 갑니다 하는 식으로 훌떡 집으로 가는게 과연 옳은 처사인가.

박순정의 눈앞에서는 전번 삼복때 땀을 철철 흘리며 집으로 찾아왔던 황정식의 얼굴모습이 얼른거리였다. 귀전에서는 그의 걸걸한 목소리가 더 크게 메아리를 일으켰다.

《할머니, 어깨를 쭉 펴고 사십시오. 자꾸 옛날일을 속에 꿍져넣지 마시고…》

박순정은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하자. 다 말해주자! 중국 남경과 송산, 먄마에서 당한 그때의 일들을 다… 그 사진속에 있는것까지…

이런 방향으로 굽이치던 박순정의 생각은 그만 또다시 절벽에 부딪쳤다. 정조를 목숨처럼 여기는것을 가장 고상한것으로, 조상전래의 어길수 없는 관습으로 삼아온 조선녀성의 고유의 감정이 머리를 쳐들어서였다.

아무렴, 안될 생각! 내가 지금 무슨 새빠진 생각을 하고있는가! 나는 다 산 몸이니 그렇다치더라도 이제 우리 아들, 딸, 사위, 며느리와 그아래로 줄줄이 잇달린 아이들이 더러운 로친네의 후손들이라는 소리를 어떻게…

박순정은 입술을 깨물며 피눈물을 삼켰다. 가슴속에서는 소리없는 우뢰가 울고있었다. 다 말해야 한다는 자각의 감정과 그것만은 죽어도 말 못하겠다는 수치의 감정이 필사적인 결투를 벌리고있었다.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그의 병약한 심장이 터져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였다. 박순정의 갈린듯 한 목소리가 울렸다.

《차…차를 좀 세워주우.》

평양시내를 벗어나 기세좋게 달리던 소형뻐스가 급히 멎어섰다.

운전사의 옆좌석에 앉았던 손녀사위가 다급히 물었다.

《할머니, 왜 그러십니까. 어디 편치않으십니까?》

아들과 며느리도 무슨 일이 났는가 하여 눈이 커졌다.

《어머니, 좀 쉬였다 가잡니까?》

아들이 나직이 물으며 박순정에게로 다가갔다.

박순정은 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누가 쉬겠다고 하더냐? 아무래도 내… 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에 들렸다 가야 할가부다.》

《예에?- 그 황선생한테랑 인사를…》

《인사는 무슨… 어제 오후에 병원에 찾아왔을 때 다 했는데.》

《그럼?…》

《글쎄, 거기에 꼭 들렸다 가야 하겠다. 여기서 그 대책위원회라는데가 머냐?》

박순정의 말소리는 또박또박했고 얼굴에는 전에 볼수 없던 비장한 기색이 내비치였다.

그때까지 박순정의 뒤좌석에 앉아 아무 말도 없던 리당비서가 나직이 말했다.

《운전사동무, 할머니의 요구대로 차를 돌립시다.》

소형뻐스는 머리를 돌려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가 자리잡은 평양역앞 영광거리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아들과 손녀사위의 팔에 의지한 박순정은 뻐스에서 내리는 길로 위원회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

콤퓨터에 마주앉아 자료를 뒤적이던 황정식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벌써 오전 11시가 되여오고있었다.

한시간전에 있은 협의회에서는 곧 있게 될 3개국합동조사단에 박순정로인을 동행시키는 문제를 두고 심각한 론의가 있었다. 그가 인차 병원에서 퇴원한다고는 하지만 그의 건강상태로 보아 동행문제는 어려운것만큼 이제라도 다른 대상을 준비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였다. 그러나 성노예생존자 태반의 건강이 좋지 못한 사정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박순정의 동행문제는 보류되게 되였고 심한 자책감에 휩싸인 황정식은 협의회가 끝난 후 자기 방에서 괴로운 상념에 잠겨있는것이였다.

갑자기 전화종소리가 울리자 그는 천천히 전화기를 들었다.

《예, 황정식입니다. 예? 지금 당장 위원장동지 방으로 말입니까? 알았습니다.》…

방안에는 황정식과 김진희 그리고 이번 3개국합동조사단사업에 관여하는 일군들이 모여있었다.

황정식은 깜짝 놀라 방으로 들어서는 박순정의 얼굴과 자기네 위원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일어섰다.

《위원장동지, 저 박순정할머니가…》

《나도 압니다.》 하고 50대쯤 되는 풍채가 좋은 녀성인 위원장이 손을 들어 황정식을 제지시키면서 박순정을 마중하여 다급히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바로 1990년대초 조선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가 발족된 후부터 10년가까이 위원장사업을 해오는 홍영숙이였다. 그는 국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이름난 관록있는 녀성인권문제전문가였다.

《할머니, 남포로 내려가신줄 알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홍위원장이 박순정의 두손을 꼭 잡고 나직이 물었다.

박순정은 《위원장, 내 꼭 할 말이 있어서 집으로 가다가 돌따섰소. 그런데… 저…》 하다가 길다란 앞탁을 마주한 초면의 사람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말꼬리를 채 맺지 못하였다.

여기가 속의것을 다 쏟아놓을데가 못되는 곳이 아닌가? 내가 때를 잘못 맞춰온것 같다. …박순정은 저도 모르게 망설이였다.

홍위원장이 박순정을 부축하여 의자가 있는쪽으로 이끌었다.

《할머니, 우선 자리에 편히 앉으십시오.》

박순정이 팔걸이의자에 걸터앉자 곁에 자리를 잡은 홍위원장이 그에게 차를 권했다.

《할머니, 차를 드세요. 마음이 푹 가라앉게…》

박순정은 차를 들면서도 자기를 주시하고있는 초면의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홍위원장은 제꺽 박순정의 속을 넘겨짚었다.

《할머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우리 피해자문제대책위원회 일군들이고 이번에 중국 남경과 송산지역에 가서 일본군성노예제도의 진상을 까밝힐 현지조사단 성원들입니다. 그러니 마음놓고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서 하십시오.》

《남경과 송산엘?》

《네, 그렇습니다. 할머니가 해방전 일본군대에 끌려다니면서 당한 일들을 죄다 조사해가지고 아직까지도 일본군성노예제도라는게 없었다고 우겨대는 저 쪽발이들한테서 값을 단단히 받아내자고 말입니다.》

박순정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힘박힌 목소리로 《그래야지, 그래야하구말구.… 황선생! 접때 보던 그 사진 어떻게 했소?》 하고 황정식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황정식은 홍위원장의 책상우에 놓여있던 문제의 그 사진을 집어들었다.

박순정은 돋보기를 코에 걸고 황정식이 자기앞에 가져다 놓은 사진에 시선을 박았다.

한동안 굳어졌던 박순정이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바위너덜에 기대인 성노예녀성의 얼굴을 탁- 소리가 나게 짚었다.

《이게, 이게 바루 그… 그때 〈와까하루〉라고 불리우던 나… 나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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