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제4장 번민


2


때각거리는 벽시계바늘이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창밖은 황혼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진희는 잠에서 깨여났다. 그는 오전에 남경에 도착하여 목욕을 하고난 뒤 11시부터 옹근 6시간을 호텔방에서 내처 잠만 잔것이였다. 렬차를 타고 수천리길을 온것도 부담이지만 그동안 쉬지 않고 현지답사준비뿐아니라 박할머니의 간호에도 왼심을 쓰다보니 몰릴대로 몰린 피로가 그를 침대에 쓰러뜨렸던것이다.

침대옆 차대우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담긴 쟁반이 놓여있고 수저옆에 《진희선생, 깨여나면 점심식사를 하고 황정식선생이 든 방으로 가보세요. 찾았습니다.》라고 쓴 글쪽지가 있었다. 녀의사가 쓴것이였다.

진희는 간단히 운동을 하고 쟁반에 담긴 군교즈 한개를 입에 넣고 호물거렸다. 배가 출출하니 별미였다.

교즈 세개를 더 집어먹고난 진희는 화장탁앞으로 가서 머리단장도 하고 옷차림새도 바로했다.

진희가 방문을 나서는데 저쪽복도에서 황정식이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그래, 이젠 피곤을 다 풀었소?》

진희는 수줍게 웃으면서 《네.》 하고는 《제가 긴장이 너무 풀렸던가 봅니다. 이쯤한 피로도 이겨내지 못하고 이렇게 대낮에 고꾸라졌으니 말입니다.》 하고 말하며 입을 싸쥐였다.

《됐소, 됐소. 이젠 잠을 보충했으니 우리 방에 가서 래일부터 할 사업이나 좀 의논해보기요. 참, 진희동무, 기뻐하오. 박순정할머니네 맏손녀가 어제 몸을 풀었다고 하오. 금딸을 낳았다누만. 내 이제 방금 조국에서 걸어온 홍위원장동지의 전화를 받았소.》

진희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네에- 정말 기쁜 일입니다. 좋은 징조로구만요. 순정할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가. 그러지 않아도 손녀애가 당장 몸을 풀겠는데 하면서 근심하시던데…》

《정말 좋은 소식이요. 평양산원에서 해산했다는데 산모도 애기도 다 건강하다고 하오. 내 지금 그 소식을 박할머니에게 알려주러 가는 길이요. 진희동무, 우리 방으로 먼저 가오. 거기에 동무들이 다 모여왔을게요. 내 제꺽 갔다오지.》

황정식은 박순정과 녀의사가 든 방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안녕하세요? 오빠!》

《오, 아사꼬로구나. 그래 몸은 별일없느냐?》

《네, 난 일없어요. 오빠는요?》

《애들이 잘 보살펴주는 덕에 건강해서 잘 지낸다. 그래 일은 잘돼가겠지?》

《네, 래일부터 여기 남경의 〈킨수이로〉를 돌아보면서 며칠간 현지편답을 하고 고증사업도 해야 해요.》

《음, 그래. 참, 평양에서 온 박순정의 신상은 어떠냐?》

《괜찮아요. 여긴 날씨도 온화하고 또 그 녀인은 원래 강기가 있고 해서… 참, 오빠. 이번 기회에 오빠가 그 녀인과 전화로 해후를 하는게 어떨가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다. 난 그를 잘 알지만 그가 날 기억해내겠는지… 그땐 내가 숱한 일본군인들속에 묻혀있었으니까.… 난 그저 아사꼬가 합동조사단에 망라된 일본인이니 매사에 심중해서 〈르번 궈이즈〉(중어로 일본놈 또는 일본도깨비)라는 소릴 듣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그리고 력사앞에 허심하고 너무 놀라지도 말고…

특히 박순정을 노엽히거나 괴롭히는 언행은 절대 삼가해야 한다. 난 두말할것도 없고 너도 죄많은 야마도민족의 일원이 아니냐?…》

아사꼬는 오빠의 당부가 죄다 리해되였지만 《죄많은 야마도민족》이라는 소리에 신경이 짜릿해나는것을 느꼈다.

그러나 은인이고 태평양전쟁때 크게 입은 복부창상으로 70을 넘긴 오늘까지 독신으로 지내면서 아사꼬가 잘되기만을 바라는 그를, 불편한 몸임에도 시간을 내여 장거리전화까지 걸어온 인정많은 히로미오빠를 탓할수가 없었다.

송수화기를 놓은 아사꼬는 히로미를 그려보았다.

히로미, 정말 히로미는 나에게 있어서 부모이상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어릴적에도 그랬지만 내 나이 60이 넘은 오늘까지 나에게 기울이는 그 마음이 얼마나…

오빠의 모습을 그려보는 아사꼬의 눈앞에는 그가 3개국합동조사단에 망라되여 현지편답을 떠나오기 전에 있은 일이 선히 떠올랐다.

아사꼬가 히로미의 집으로 가서 편답로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히로미가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남경에 갔다가 그길로 또 송산엘?… 그러니 너도 이번에 송산전역에까지 간단 말이지?》

《네, 이번에 3개국합동조사단에서 편답로정을 그렇게 락착지었어요.》

히로미는 무엇때문인지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아사꼬야, 네가 너무 서둘러 맞도장을 친것 같구나.… 내 생각에는 너만은 남경에 가서 현지조사를 마친 다음 적당한 구실을 대고 귀국하는게 좋을것 같다.》

《오빠, 그건 무엇때문에…》

《글쎄, 내 생각되는게 있어서 그런다. 송산까지는 가지 말아라.》

《호호… 오빠도 참, 내친걸음에 끝까지 간다는 말도 있는데 남경에 갔던바엔 송산전역까지 다 돌아봐야지요. 이번이 좋은 기회가 아니나요. 우리 련합에서도 그리고 우리 정부에서도 내 결심을 지지했는데…》

히로미가 별안간 어성을 높였다.

《우리 정부? 그 문제는 정부와 관계가 없어! 너희네 민간단체가 하는 일에 정부가 무슨 간참이야!…》

아사꼬는 영문을 알수가 없어 히로미를 한참 쳐다보았다. 오빠가 무엇때문에 이럴가? 아사꼬는 도저히 리해가 가지 않았다.

잠시 방안에 무거운 공기가 떠돌았다.

히로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내가 공연히 큰소릴 친것 같구나. 잘못했다. 내 생각만 하다나니 그렇게 됐구나. 용서해라. 그러나 잘 생각해보아라. 너도 이젠 60을 넘겼어. 그 몸으로 험하기 그지없는 산악지대를 편답한다는것도 그렇고 또 네가 그곳에 갔다가…》

히로미는 무슨 말인가 더 하려다가 말허리를 잘랐다.

아사꼬는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참, 오빠도 괜한 걱정을 하시네. 나야 그 80이 다된 조선의 박순정에게 비하면야 한창 청춘인데 뭐가 두려워서… 난 이번에 오빠가 태평양전쟁때 가있었다는 송산전역에도 꼭 가봐야 하겠어요.》

《허 참, 고집두…》

히로미는 지팽이를 짚고 뚜걱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내 말대로 하는게 좋아. 너를 위해서도 그렇고… 흠-》…

아사꼬는 그날 자기의 신상을 걱정하며 마음을 놓지 못해 한숨까지 내불던 히로미의 모습을 그려보며 혼자서 웃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지금 아사꼬는 마음이 편안한것도 아니였다. 녀성인권옹호시민련합의 번대머리공동대표와 문부성 과장 이찌로의 바래움을 받으며 나리다비행장을 떠날 때까지는 자기가 쥔 《주패장》을 확고한것으로 여기였는데 정작 남경에 와보니 어쩐지 자신심이 줄어드는감을 느꼈던것이다. 특히 오전에 조선측 조사단성원들과 동행한 고령의 박순정의 모습을 본 다음부터는 더욱 그러했다.

오빠와 통화를 마친 후에도 한동안 호텔방에서 착잡해지는 마음을 애써 달래던 아사꼬는 드디여 다음날 오후부터 진행할 현지편답준비에 달라붙었다.

그가 각종 조사자료들이 들어있는 휴대용트렁크속에서 《부덕쥐》가 미국회도서관에서 물어온 사진들을 꺼내는데 갑자기 빨간색전화기가 《짜랑-》 하고 울었다.

아사꼬는 사진을 한손에 쥔채로 전화기가 있는 탁앞으로 다가갔다.

호텔교환수의 청고운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도꾜에서 오신 법률가 도모이 아사꼬선생이시지요?》

교환수처녀의 일본말발음이 아주 정확하였다.

송수화기를 받쳐든 아사꼬는 탁앞의 의자에 엉치를 붙이며 응대하였다.

《그래요. 무슨 일인데…》

《일본 문부성에서 걸어오는 전화입니다. 제가 련결해드리겠으니 어서 받으세요.》

아사꼬는 이찌로가 걸어온 전화라는것을 제꺽 짐작하였다.

송수화기에서 약간한 잡음이 들리더니 상상했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아사꼬상, 이찌로가 문안합니다. 그간 수고가 많겠소.》

《수고야 무슨… 아직 정식 조사에 진입도 못했는데…》

아사꼬는 몇달전 도꾜의 음침한 료정에서 변태적인 행동을 하던 이찌로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그의 전화도 반갑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거나말거나 이찌로는 제 흥에 겨워 아사꼬를 한참 추어올리고 나서 이렇게 잇댔다.

《아사꼬상, 우리 정부와 국민이 당신을 믿고있다는것을 언제나 명심하시오.… 어련하겠소만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묻어버려야 할것과 부각시켜야 할것을 잘 갈라보면서 일을 용의주도하게 처리하여 월계관을 차지하시오.… 며칠후 다시 통화를 합시다. 그럼 안녕!》

이찌로는 어느날 몇시에 다시 전화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거의 일방적으로 진행된 통화였다.

아사꼬는 방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이찌로가 마감에 한 말들을 곰곰히 재음미해보았다.

묻어버려야 할것과 부각시켜야 할것을 잘 갈라보라?… 새겨볼수록 강박에 가까운 그 말에 속이 뒤틀려났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씩씩거리던 아사꼬는 창밖으로 멀리 일본방향이라고 짐작되는 하늘가를 바라보며 《이찌로, 당신은 이 늙은 녀성도 료정의 접대부처럼 제 마음대로 주무를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니요?》 하고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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