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제4장 번민


3


전홍이 아사꼬의 방에 들어섰다. 어느때 보아도 싱글벙글하는 모습이다.

아사꼬가 피끗 그를 넘겨다보며 퉁을 놓았다.

《언제 봐야 당신은 헤- 해가지고… 그 모양이 꼭 촬영기렌즈같군요.》

전홍은 탓하지 않고 맞방아질을 했다.

《그런 핀잔마시오. 이 〈부덕쥐〉가 헤- 해가지고 다니는 덕에 아사꼬상이 보는것마다 인기뉴스감이고 듣는것마다 토프뉴스감인줄이나 알아두시오.》

이쯤하면 《부덕쥐》가 또 뭘 물어왔다는 신호이다.

아니나다를가 전홍은 아사꼬의 곁으로 다가오며 《희한한 소식입니다.》 하고 어깨를 으쓱거리였다.

《무슨 소식인데…》

《저 평양에서 온 박순정로인이 어제 증손녀를 보았답니다.》

《아니, 그럼 지난해말에 시집을 갔다던 그 맏손녀가?…》

아사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의 눈은 처녀들의것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아사꼬는 지난해 봄 평양을 방문했을적에 박순정과 함께 평양고려호텔에 온 어느 학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는 맏손녀를 본적이 있었다. 이목구비가 그쯘하고 성격도 활달한 축이였다.

그때 아사꼬는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박순정이 손자, 손녀들을 무척 귀해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특히 다 자란 맏손녀를 특별히 애지중지해하였는데 그애가 대학시절에 학교에서 늦게 올 때면 매번 대문밖에 나가서 기다리군 했다고 한다.

《처녀가 인정이 헤프면 실수하게 되느니라. 그러니 매사에 심중하고 또 주의해야 한다.》

박순정은 맏손녀에게 늘 이렇게 훈계를 했다고 한다.

그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아사꼬는 자기의 치욕스러운 과거에 돌멩이를 던진 박순정으로서는 십분 그럴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박순정이 귀한 증손녀까지 보았으니 얼마나 기뻐할가. 그렇다면 뭘 좀 준비해야 하지 않는가? 가만, 조선풍습대로라면 애기옷을 선물하는게 제격인데… 아니, 아니다. 애기옷 같은것은 이번 현지편답을 다 끝내고 헤여질 때 주는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러니…

아사꼬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덧옷을 벗겨들었다.

《아니, 어델 가시려고…》

전홍은 뻥해서 물었다.

《남자들이란 참, 당신은 눈치가 있는것 같으면서도 눈치가 없어요. 전홍상, 이게 좀 좋은 기회요?》

그랬다. 이 순간이야말로 아사꼬가 박순정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사실 오전에 남경역에서 조선측 조사단을 마중하다가 아사꼬는 박순정으로부터 뜻밖의 랭대를 받았다. 렬차에서 내린 그에게 일본에서 온 녀성법률가라며 아사꼬를 소개하자 대뜸 눈빛이 사나와지며 얼굴을 옆으로 돌려버렸던것이다.

오후에 두시간나마 아사꼬가 호텔옥상에 올라가 번민하게 된것도, 방금전 이찌로가 하는 전화를 기분나쁜 상태에서 받게 된것도 다 그 감정의 연장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아사꼬는 박순정이 자기를 《반성을 모르는 일본인》으로 대하며 경멸하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는터이라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저녁식사시간까지는 한 40분 남아있었다.

아사꼬는 《자, 빨리!》 하며 전홍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어데로 가시려고…》

《박상을 축하해주자면 꽃이 있어야지요?》

《정말 그렇구만.》

호텔을 나선 아사꼬와 전홍은 꽃상점으로 갔다.

향기풍기는 싱싱한 튜립으로 엮은 꽃다발을 사든 아사꼬의 얼굴에서 웃음이 피여났다.

아사꼬와 전홍은 발에 날개를 달고 다시 호텔로 향했다.

그들이 박순정이 든 방에 들어서니 김진희와 녀의사가 방주인과 함께 텔레비죤수상기를 마주하고있었다. 상당히 즐거운 분위기였다.

(저들도 증손녀를 본 박할머니를 축하해주러 왔구나.)

방금전에도 중국측 조사단 녀성들과 통역원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박순정을 축하해주면서 한창 기쁨을 나누다가 돌아갔던것이다.

진희는 아사꼬와 전홍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아사꼬와 전홍은 웃으며 박순정에게로 다가가 두손을 모아잡고 머리를 까딱하면서 무릎을 살짝 굽혔다.

《박상, 귀여운 증손녀의 출생을 축하해요.》

아사꼬가 안고 온 꽃다발을 박순정의 앞에 내밀자 일어에 능한 진희가 제꺽 통역을 하였다.

전홍도 아사꼬가 하는대로 손에 들었던 꽃다발을 박순정의 가슴에 안겨주며 고개를 까딱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일이 별나게 번져져갔다.

꽃다발을 받은 박순정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가시박힌 말이 튀여나왔다.

《고맙기는 하네만 허, 내 지금 꼭 일본땅에 와있는것 같구만.》

박순정이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흔들자 영문을 몰라 벙벙해있는 아사꼬에게 조선말을 아는 전홍이 더수기를 긁적이며 통역을 하였다.

아사꼬와 전홍의 모습은 돌변하였다. 얼굴이 허옇게 된 그들은 뻣뻣이 선채로 허둥거리기 시작하였다.

곁에 있던 김진희와 녀의사가 더 난처해졌다.

진희가 박순정의 손을 꼭 잡으며 《할머니, 할머니를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하고 나직이 속삭이였다.

박순정이 진희를 바라보며 버럭 어성을 높였다.

《연구사선생, 나도 알고있소. 이러는게 인사불성이고 례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라는걸… 그러나 누구든 지금 내 처지에 빠져보오. 그래 나 같은 사람이 일본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히히하하 하면서 웃을수 있을것 같소? 천만에! 하느님처럼 인자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래도 절대로 그렇게는 못할거요!》

텔레비죤에서는 흥겨운 중국음악이 흘러나왔지만 방안에는 무거운 공기만 꽉 찼다.

잠시후 박순정은 탕개를 풀면서 《마침 잘 왔소. 나도 한번 일본에서 온 선생들을 만나봐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댔는데 어서 자리들을 잡고 앉소.》 하고 아사꼬와 전홍에게 손짓하였다.

자리에 앉은 전홍은 억울한지 툴툴거리였다.

《할머니, 미안하지만 저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재일중국인입니다.》

그리고는 또 늙은이한테서 미움을 살가보아 슬슬 눈치를 살폈다.

박순정이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본에서 사는 중국사람?… 이러나저러나간에 일본에서 사느라니 고생 꽤나 하겠구만.》

그리고나서 그는 아사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본에서 법률가를 한다는 선생, 방금 내가 언행에서 과했다면 량해하오. 전번에 평양에서 만났을 때에도 말했지만 이 늙은이가 옛날 일본사람들한테서 어떤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 당신도 알지 않…》

박순정은 너무도 격해서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였다.

아사꼬는 할 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같은 녀성으로서 박순정의 심정이 충분히 리해되여서였다.

짐승같은 깡패들에게 륜간당하고 목을 맨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망막에 새기고있는 아사꼬로서는 박순정에게로 동정의 마음이 쏠리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기침을 몇번 깇고난 박순정은 계속했다.

《일본에서 온 량반들, 생각들을 좀 해보시오. 내가 왜 지금 이런 꼴을 해가지고 수천리 남의 나라 땅에까지 따라와서 이렇게 괴로움속에 지내는것 같소?…

일본군이 날 이렇게 만들어놓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쯤 숱한 아들딸을 낳은 에미로서 자손들을 가득 거느리고 남들처럼 말년의 락을 누리고있었을게요. 그리고 괜히 선생들 같은 사람들에게 이렇다저렇다 큰소리도 안 쳤을게고…

난 지금 한많은 내 인생이 이러다말가보아 몹시 근심하고있소. 명백히 말하면 당신네 일본정부가 지난 시기 일본군대가 저지른 엄청난 죄과에 대하여 사죄하고 배상하는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가봐 자다가도 소스라치군 한다오.

오늘 육신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이 늙은이가 죽기를 각오하고 이 먼데를 찾아온거나 할 일도 많은 여러 선생들이 고생스레 여기에 온건 다 당신네 일본정부가 옛날 일본군에 성노예제도라는게 없었다고 자꾸 우기면서 또 조선을 어째볼가 해서 속에 칼을 품고있기때문에 빚어진 일이 아니겠소. 당신네 일본이라는 나라가 옛날 저지른 죄를 그대로 활딱 드러내놓고 잘못을 빌고 세상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사죄도 하고 배상도 했으문야 난 어제 벌써 평양산원에 가서 귀여운 내 증손녀도 안아보았을게고 이런 고달픈 놀음도 당초에 하지 않았을게요… 선생, 이 늙은것이 왜 이런 말을 자꾸 곱씹는가 하는것을 똑똑히 새겨두오. 그리고 이담에 다른 일본사람들에게도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시오.》

아사꼬도 놀랐지만 박순정의 말을 통역해주는 김진희가 더 놀랐다.

아니, 어제 저녁 렬차칸에서는 제발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떼를 쓰던 할머니의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다…

김진희는 박순정을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사꼬는 박순정의 진심의 호소앞에서 초절임되고말았다.

말은 넌지시 하는 말이 비싸다고 저 말앞에서는 정말 변명할수가 없구나. 여기에 그 어떤 반박이 통하겠는가. 할수 없지. 오빠가 말한것처럼 나도 죄많은 야마도민족의 일원임이 틀림없으니까…

아사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슴서슴하더니 박순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의 두손을 꼭 잡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목구멍에까지 올라왔던 《저… 저의 어머니도…》라는 말을 하려다가 도로 삼켜버렸다.

자기 어머니도 불량배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목을 맸지만 그것을 어떻게 박순정할머니가 몇년간이나 일본군대에게서 당한 그 엄청난것에 비길수 있겠는가 하는 심리에서였다.

아사꼬는 그때에야 자기가 도꾜의 음침한 료정에서 이찌로와 그 번대머리공동대표에게 내보인 《주패장》이 결코 이기는자의 《주패장》이 아니라는것을 조금 감촉하였다.

그러나 승벽심이 강한 아사꼬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현지조사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바보처럼 자포자기할수야 없지. 길고짧은것은 대봐야 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숨 돌려 마음을 크게 먹은 아사꼬는 박순정에게 또박또박 말하였다.

《박상, 저는 당신의 그 심중을 압니다. 그… 그저… 욕 많이 하…하십시오.》

아사꼬가 제딴에는 큰소리로 당당하게 말머리를 뗐지만 나중에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입속에서 잦아버리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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