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제5장 《바로 이 집이요!》


6


현지조사가 심화될수록 상상밖의 력사적사실들이 세월의 대문을 제끼고 뛰쳐나와 아사꼬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사꼬는 점점 손맥이 풀리는것을 느꼈다.

이날도 《킨수이로》에서 현장조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온 아사꼬는 저녁식사후 박순정의 증언자료들과 옛날 리제항《위안소》에서 화부로 일한적이 있는 80살 난 로인을 만나 청취한 록음자료들을 정리하여 트렁크속에 구겨박고는 침대에 벌렁 나가누웠다.

그때 앞탁우에 놓인 전화기에서 《따릉-》 하는 소리가 났다.

송수화기를 드니 호텔 교환수처녀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도모이 아사꼬선생이시지요?》

《그래요.》

《선생님, 도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누워서 전화를 받던 아사꼬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오빠로구나! 힘들겠는데 내가 걱정되여 또 전화를…

아사꼬는 교환수처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송수화기를 바로 잡았다.

그런데 전화를 걸어온 임자는 히로미오빠가 아니라 오가와 이찌로였다.

《아사꼬상, 이찌로가 문안드립니다. 그간 현지조사에서 수고가 많겠소. 적지 않은 나이에 우리 정부와 국민의 뜻을 받들고 고군분투하는 아사꼬상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바이요. 우리가 당신을 굳게 믿고있다는것을 언제나 명심하기를 바라오.…》

중대가리 이찌로는 또다시 입에 침을 바르고 아사꼬를 한참 추어올렸다.

그러나 아사꼬에게는 이찌로의 전화가 전번보다 더 역겹게 느껴졌다. 그래서 묵묵부답으로 대화를 대치했다.

말장사군인 이찌로는 계속했다.

《아사꼬상, 이제는 현지편답을 한지도 며칠 잘되였는데 가지고간 〈주패장〉이 이기는자의 〈주패장〉이라는걸 확인했겠지?》

《민간업자책임론》의 증인으로 내정했던 박순정으로부터 3개국합동조사단 성원들앞에서 《난 처녀때 이곳 〈킨수이로〉에 와있었는데 루주는 돈밖에 모르는 일본인사복쟁이부부간이였다.》고 하는 증언을 받아냈는가 하는 물음이였다.

아사꼬가 아무 대답이 없자 이찌로는 더 볶았다쳤다.

《아, 왜 대답이 없나?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구만.》

그때에야 아사꼬가 한마디 하였다.

《그건 이찌로상이 걱정 안해도 될것 같아요.》

《그럼 〈민간업자책임론〉을 인정시킬수 있는 증언을 받아냈다는건데…》

《글쎄, 그렇게 볼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아사꼬는 첫날 《킨수이로》에 간 박순정이 합동조사단 성원들앞에서 루주가 조선말과 중국말도 잘하는 일본인사민부부였다고 말한 사실만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그후에 한 말에 대해서는 내비치지 않았다.

했으나 이찌로는 벌써 환성부터 올렸다.

《그렇소? 됐소. 성공을 축하하오! 그럼 빨리 귀로에 올라야지. 우리가 〈개선장군〉의 영접준비를 잘해놓고 기다리겠소.》

아사꼬는 이찌로의 칭찬이 더없이 역겨웠다. 그가 하는 말에서 심한 강박감을 느꼈기때문이였다.

자존심이 보통이 아닌 아사꼬가 엇서나갔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것 같아요. 아직 여기 남경에서 며칠을 더 편답하면서 조사를 마저 하고 운남성의 송산전역에도 가봐야 하겠어요.》

《아니, 아니. 전번에는 아사꼬상이 송산전역에도 가는것으로 했었지만 목적했던바를 달성했으니 남경지구에 대한 편답을 마치고 합동조사단에서 탈퇴하여 귀국하면 되겠소. 그 다음 박순정의 그 증언을 가지고 가공만 잘하면야 우리의 〈민간업자책임론〉은 만세를 부르게 될거요. 그러니 내 말대로 남경에서 일정을 마감하고 빨리 귀국하시오.》

흥분한 이찌로는 아사꼬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지시를 망탕 주었다.

아사꼬는 발끈 성을 내였다.

《이찌로상, 당신은 여기 남경에 와있는 녀성인권옹호시민련합 공동대표를 자기의 직계부하로 착각하는것이 아닌가요?》

《아, 그렇게 느껴진다면 내가 실례했습니다. 그런건 아니고…》

이찌로가 제꺽 둘러치며 퍽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하였다.

《아사꼬상, 제가 실례했음을 심심히 사과합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말씀드릴건 송산전역에 대한 편답에는 참여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의향입니다.》

아사꼬의 어성이 더 날카로워졌다.

《아니, 난 그곳에도 가보아야 하겠어요. 그리 알고 다시는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자, 어때요. 이젠 그만하는것이 좋지 않을가요?》

아사꼬의 성미를 잘 아는 이찌로로서는 더는 어쩌지 못했다.

《아사꼬상, 당신이 기어이 가겠다니 더 막지 않겠는데 이 이찌로는 아사꼬상이 자기를 그렇게 위해주던 외삼촌을 법정에 내세우는 그런 우둔한 인간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뿐입니다.》

(외삼촌 니쇼꾸를 법정에 내세우는 우둔한 인간?)

이찌로의 말을 새겨보던 아사꼬는 송수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그러니 이찌로는 나를 리용하여 자기의 음흉한 목적을 이뤄보자고 한단 말이지. 내가 정신적지주로 삼고있는 《국민옹호정신》을 악용하면서… 위선자! 틀림없는 위선자야. 그리고 천하에 둘도 없는 호색광이다! 그래. 호색광이니 위선자일수밖에… 그런 작자가 정부기관의 과장자리에 앉아있으니… 하긴 력사적으로 우리 일본남아들은 색에 밭다는 말을 많이 들어온것만은 사실이지.…)

눈을 꾹 감고 이런 생각을 하느라니 아사꼬의 머리속에는 자기 어머니가 생전에 들려주던 이야기가 불쑥 떠올랐다.

아사꼬의 어머니는 중학교 력사교원이였다. 어머니는 짬만 있으면 아사꼬에게 일본의 력사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군 하였는데 긍정적인것이든 부정적인것이든 사실을 그대로 다 말해주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대바르게 키우기 위해서였다.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평정하는데서 주역을 담당했던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생전에 그리스도교를 심하게 박해했단다.…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그리스도교녀성이 색에 밭은 자기의 잠자리시중을 거부한데 있었다고들 하더라.》

어머니는 아사꼬에게 그 이야기를 몇번이나 들려주었는데 매번 이런 이야기로 허두를 떼군 하였다.

…1587년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일본전국을 평정하기 위해 규슈원정을 할 때였다.

당시 규슈지방의 일부 다이묘(봉건령주)들은 카톨릭교와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외국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나가사끼를 교회령으로 내맡기고있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이런 사실에 기분이 잡쳐졌다. 그러나 더 기분나쁜 일은 그 다음에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아리마라는 다이묘의 령지에서 미모의 처녀들을 구해 자기의 잠자리시중을 들게 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선정된 처녀들은 전부 그리스도교로서 순결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교리를 따르면서 그의 요구를 거절해버렸던것이다.

이 사실에 독을 품은 히데요시는 그해 전국적판도에서 일체 전도를 금지시키고 외국선교사들을 모두 추방시켜버렸다.

아사꼬의 어머니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사실 히데요시가 교회를 배척한건 그리스도교나 카톨릭교를 나쁘게 보아서가 아니라 그의 골수에까지 꽉 들어찬 녀성학대정신이 현실적으로 도전에 부딪친 그것때문이였단다.… 그후 도꾸가와막부시대에 와서 녀성학대정신은 가부장제에 더 단단히 비끄러매이게 되였단다. 그런 가부장적노예제때문에 결국 당시 일본도처에 공창, 사창들이 여느때없이 번창했고 적지 않은 남자들은 처첩을 서너명씩 거느리고 살았단다. 막부시대에도 그랬고 명치유신후에도 마찬가지였단다. 바로 그런 때 다처제를 반대하고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는 개명한 사람이 나타났단다.》

《야, 참 좋은 사람이구나!》

아사꼬가 기뻐하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 사람이 바로 그때 문부상을 하던 너의 증조할아버지란다.》 하고 말하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었다.

아사꼬의 증조할아버지는 2년간에 걸쳐 일본에서 발간된 잡지에 《처첩론》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세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5회에 걸쳐 련재한 글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부부의 사귐은 인륜의 근본이요, 인간인 이상 결혼해서는 남녀평등으로 권리와 의무를 서로 나누는것은 의당한 일이다.

그런데 일본의 현상은 한 남편이 여러 처를 거느리니 이것은 개, 돼지, 말과 무엇이 다른가.

남편들은 노예의 주인과 같고 처는 몸을 파는 노예와 같다. 이렇게 녀자를 남자보다 한단계 낮은 하등동물로 보면서도 녀자측에만 정절을 요구하는것이 얼마나 부당한가.

일본에서 부부관계가 정당한것이 되고 일본의 문명이 진보하기 위해서는 특히 녀자도 스스로 분발하여 개명에 힘쓰는것이 중요하다.…》

당시로 보면 이 주장은 훌륭한것이였다. 그런데 그만 문부상이였던 증조할아버지는 얼마후 우익테로에 의해 살해당하여 한줌의 재로 되고말았다. 결국 그의 《일부일처제론》도 연기로 사라져버렸다.

1914년 5월 일본 그리스도교회동맹에서 《부녀유괴에 관한 형법을 개정할것, 양녀제도를 개정하고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목적을 가지고 녀자를 데려다 기르는것을 엄금할것, 녀자의 응낙년령을 13살인것을 16살로 개정할것, 공창제도를 철페할것…》 등의 조항들로 엮어진 결의안을 중의원에 건의할 때에도 아사꼬의 할아버지인 기로꾸가 그 주동인물이 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그 노력도 헛된 꿈으로 끝나고말았던것이다.…

아사꼬는 품에 소중히 간수하고 다니던 자그마한 사진을 꺼내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정히 앉아있고 그가운데는 4살 난 자기, 뒤줄 중심에는 일본군복차림에 코수염이 유표한 외삼촌 니쇼꾸가 서있는 모습이 찍혀진 사진이였다.

아버지가 생전에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한것도 대대로 좋은 가풍을 물려온 가문에서 살아왔기때문이였구나! 그리고 전장에서 순직한 외삼촌도…

그런데 현실적으로 세상사람들은 우리 일본의 남아들을 죄다 호색한으로 락인하고있다. 일본군을 호색광이라 하는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들은 식민지나라 녀성들을 성노예로 끌고 다니면서 꺼리낌없이 집단적인 강간행위를 하고도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이러나저러나간에 우리 일본의 력사는 더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난 그것을 자그마한 이 손바닥으로 어떻게 하나 덮어보자고 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지, 어리석어. 아마 무덤속에 있는 아버지, 어머니도, 외삼촌도 이 아사꼬를 비웃으며 힐책하실거야… 아!-

아사꼬는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고민은 박순정이 입을 열면 열수록, 여러 반증자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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