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제8장 증 인


5


아사꼬는 차머리를 히띠로 돌렸다. 전 113련대 고급참모였던 다께모또 겐지의 집으로 가보자는 심산에서였다.

아사꼬가 겨누고 갔던 집에 들어서니 89년 묵은 늙은 승냥이- 겐지가 침상에 누워있었다.

아사꼬가 찾아온 용건을 말하며 《하나꼬》라고 불리우던 《위안부》녀성과 《와까하루》라고 불리우던 《위안부》녀성을 아는가고 물었다.

겐지의 희뿌연 눈동자에 독기가 번뜩이기 시작하였다. 《위안부》라는 말을 듣자 너무도 흥분하여 말까지 떠듬거리였다.

《난… 난… 중국의 남경과 송산에 가있은적은 있…지만 〈하나꼬〉라는 녀자는 모…모르오. 〈와까하루〉라는 죠센징도 모…모르고… 거기에는 〈위안소〉가 없…없었소. 그…그건 우리 야마도민족을 시…궁창에 처박으려는 나쁜 사람들의 허…튼소리요. 선…생도 일본국민인데 야스구니진쟈에 그늘을 던지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게 좋…겠소. 난… 난 아무것도 모르오.》

겐지의 육체는 이미 거의다 사멸되였지만 사상은 여전히 국수주의와 군국주의로 충만되여있었다. 일본군에 《위안부》제도라는것이 없었다고 시치미를 떼는 우익반동의 표본이였고 현 일본정부의 축도라고 할수도 있었다.

곁에서 아버지가 떠듬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있던 머리가 허연 딸이 아사꼬의 팔을 툭 건드리였다.

그리고는 격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안됐소만 법률가선생, 우리 부친의 말을 들었댔자 계속 같은 소리가 나올건 뻔한데 이제는 저의 부친을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어요. 년로하신분앞에서 지난날의 불미스러운 이야기만 자꾸 꺼내는것이 옳은 처사는 아닌것 같은데…》

아사꼬는 자기 입에서 중국 남경과 송산에 있던 《위안소》이야기가 나올 때 눈을 흘기면서 입술을 깨무는 딸의 심중을 제꺽 파악하였다. 자기 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지난 중일전쟁때부터 태평양전쟁이 마무리되던 시기까지 일본군이 중국과 먄마에서 저지른 불미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확인하러온 그런 불청객이 반가울리 만무한것이였다.

아사꼬는 겐지의 딸에게 량해를 구하는 뜻에서 두손을 모아잡고 머리를 까딱거린 후 나직이 말했다.

《저- 웃방으로 올라가서 이야기를 좀 나눌수 없을가요?》

겐지의 딸은 불쾌하였지만 손님의 청을 거절할수가 없어서인지 마지못해 응했다.

조용한 웃방에서 아사꼬는 겐지의 딸과 마주앉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부친을 너무 괴롭히는 말만 해서 안됐어요. 이젠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으니 다른 이야기나 나누자요.》

아사꼬가 이렇게 나오자 겐지의 딸의 얼굴도 좀 밝아졌다.

이날 아사꼬는 겐지의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겐지의 종전이후의 행적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였다.

송산에서 수무천을 건너 도망친 겐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8월초까지 중국 광주에 있는 5촌형네 집에 있다가 일제의 패망이 선언되자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그후 홍콩에서 1년 반가량 돈벌이를 한 다음 밀선에 올라 귀향하였다.

그 시기는 미군이 일본본토를 타고앉았을 때이고 일본사람들은 《대동아성전》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기아와 빈궁의 나락에서 허덕이고있을 때였다. 일본의 경제라는건 오래동안 지속된 전쟁에 깡그리 피를 빨리우고 게다가 련합군의 무자비한 폭격으로 완전히 거덜이 났던것이다.

당시 두 딸을 데리고 고향 히띠에서 생활하던 겐지의 본처는 미군비행기들의 폭격에 한쪽다리를 잃은 불구자가 되여 막심한 고생을 하고있었다.

이미전에 본처에 대한 정을 다 줴버린 겐지는 그것을 좋은 구실로 삼고 그와 리혼하였다.

그후 인차 홍콩에서부터 치정관계를 맺고있던 젊은 일본처녀를 후처로 맞아들이는 놀음을 벌렸다. 본처가 낳은 어린 두 딸들이 발버둥질을 치고 이웃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으나 그런데는 꿈쩍도 안하는 겐지였다.

그때 겐지가 제일 신경을 쓴것은 자기의 신변문제였다.

겐지가 고향 히띠로 돌아온 직후 미극동군사령부에서는 전범자들을 색출하여 체포하는 놀음을 대대적으로 벌리고있었다. 일본군의 련대고급참모를 한 겐지도 례외로 되지 않았다. 잡히면 처형되든가 감옥밥을 먹을 판이였다. 눈치빠른 겐지는 고향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속의 어느 한 사찰로 들어가 중으로 변신을 하였다. 그때 후처를 데리고갔던 겐지는 거기서 1948년 초봄에 아들을 보았던것이다.

그후 미군의 전범자색출바람이 잦아들고말자 겐지는 약삭바르게 운명의 배를 갈아타고 미군에게 매달렸다. 처음 한동안은 홍콩에서 번 돈으로 자그마한 철공소를 운영하면서 그것을 미군의 군수기재수리소로 전환시켰다. 미군을 위해 복무하는 군수업체의 경영자가 된셈이였다. 그것이 1949년경의 일이라고 한다.…

나직한 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겐지의 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상에 누워있는 부친의 시중을 들어야 할 일이 생겼기때문이였다.

그사이 아사꼬는 바람도 쏘일겸 밖으로 나갔다가 옆집에서 산다는 겐지보다 나이가 퍽 아래인 한 로인을 알게 되여 그와 마주앉았다.

그 로인은 군복무경력은 없었지만 종전후의 겐지의 행적을 휑하니 꿰들고있었다. 겐지가 후처를 얻어가지고 중노릇을 하면서 아들을 본 사실 같은것도 구체적으로 알고있었다.

아사꼬는 그 로인을 통하여 겐지가 1950년 중순경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경위에 대하여서도 비교적 상세히 파악하게 되였다.

1950년 6월 조선전쟁이 터지자 약삭바른 겐지는 미군의 군수물자조달자로 맹활약을 하여 일약 큰 부자가 되였다. 그것을 발판으로 1960년대초 이께다내각때에는 참의원 의원으로까지 되였으며 《한일회담》이 벌어지던 때에는 일본경제시찰단 성원으로 남조선에 가서 군국주의냄새를 진하게 풍겼다.

말년에 겐지는 야스구니진쟈를 가장 신성한 곳이라고, 가장 거룩한 선인들이 잠든 곳이라고 뇌까리면서 이른바 《영령보답회》 고문이라는 자리에까지 게바라올랐다.

그런 겐지이기에 다 늙어빠진 육신을 끌고 야스구니진쟈를 때없이 찾군 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어느해인가 《8.15종전의 날》에는 옛 일본군시절에 입었던 낡은 군복에 군도를 차고 야스구니진쟈앞에서 《아시아해방》을 부르짖으며 《야마도민족의 무궁번영을 위해 한몸을 기꺼이 바친 영령들의 뜻에 보답하자!》라는 구호까지 웨쳐 집안사람들은 물론 뭇사람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겐지의 한생은 지독한 군국주의자의 한생이였으며한생의 갈피에는 더러운 호색광, 지독한 전쟁광의 자욱이 뚜렷이 새겨져있었다.

아사꼬는 잠시후에 다시 겐지의 딸과 마주앉았다.

그는 좀전과는 달리 느슨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부친은 지금 로환으로 꼼짝 못하지만 몇년전까지는 한잔 마시고 자식들에게 훈계할 때면 〈우리는 부활해야 하느니라.〉 하는 성경의 구절을 외우군 했지요. …부친은 중국과 먄마의 전장에서 자기가 련합군에 잡히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건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신령님과 〈천황〉의 뜻이고 그 뜻을 현실로 꽃피우기 위해 죽을수 없었다고 늘 외웠지요. 그리고 태평양전쟁때 일본에 도죠 히데끼 같은 인물이 두명만 있었대도 일본은 패전하지 않았을것이라는 황당한 소리까지 하군 했지요. 그런 아버지이니까 후처에게서 본 아들의 이름을 〈히데끼〉라고 지었더군요. 물론 후에 고쳤지만…》

아사꼬는 히데끼라고 하던 아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는가고 묻고싶었지만 참았다. 힘들게 입을 뗀 녀인의 진심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는 심산에서였다.

겐지의 딸은 준비없이 시작한 이야기였지만 아주 조리있게 엮어나갔다.

《우리 부친은 취중이면 마주앉은 친지들에게 기녀들에 대한 얘기도 적지 않게 했지요. 나도 어릴적에 부친이 술좌석에서 하는 그러루한 이야기를 많이 귀동냥했어요. 그래서 부친의 부끄러운 과거도 알게 되였고 우리 일본국의 천성적인 남존녀비의 관습과 도덕적저렬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였지요.…》

이때 집마당가로 승용차 한대가 들어섰다.

딸이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더니 황황히 다가와 아사꼬의 귀에 대고 속삭이였다.

《법률가선생, 우리 남동생이 왔구만요. 그가 듣는데서는 절대로 〈위안부〉문제를 입에 올리지 마세요. 부탁해요.》

아사꼬가 머리를 끄덕이는데 그들이 있는 방으로 테가 큰 색안경을 낀 사람이 들어섰다.

아사꼬는 너무도 놀라 벌렁 나자빠질번 했다.

《아니, 오가와 이찌로?》

아사꼬의 눈앞으로는 문부성의 중대가리과장 오가와 이찌로의 흉물스러운 얼굴이 유령의 상판대기처럼 몸서리가 칠 정도로 확 다가들었다.

《유령》이 색안경을 벗으면서 독기가 서린 어조로 빈정거렸다.

《그렇소. 나요. 오가와 이찌로요. 아사꼬, 당신은 너무하오!》

《?》

아사꼬의 앞에 나선 사람이 다름아닌 겐지가 히데끼라고 이름지었던 바로 그 아들이였다.

그가 다께모또 히데끼라는 이름을 줴버리고 오가와 이찌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데도 정말 기막힌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일본의 특급전범자 도죠 히데끼가 극동군사재판에 회부되여 1948년말에 교수형으로 처형된 이후 마을사람들은 포대기에 싸인 겐지의 아들을 볼 때마다 《히데끼야, 너도 교수대에 매달릴수 있으니 조심해라.》라는 롱담을 자주 입에 올리군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겐지는 성이 독같이 올라 씩씩거리다가 아들애의 이름을 다께모또 이찌로로 고쳤던것이다.

그런데 다께모또 이찌로는 24살때 딸 하나를 둔 오가와라는 성을 가진 돈많은 사람의 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자기의 이름을 또다시 오가와 이찌로로 바꾸었다. 일본풍습에는 딸밖에 없는 집에 들어가는 사위들이 자기의 성을 가시집켠의 성으로 바꿀수 있었는데 이것은 법적으로도 용인되고있었던것이다. 그때 겐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성을 바꾸는것을 결사반대했으나 그 아들은 결사적으로 다께모또라는 성을 내버렸다. 대신 오가와라는 성을 가졌다. 가시집의 돈을 바라고 한짓이였다. 하긴 겐지가 불쌍한 본처를 헌신짝처럼 내버린데 비하면 약과였지만 애비나 아들이나 피를 나눈 사람들까지 내버리는데서는 솜씨가 있는 인간오작품들이였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그후 겐지의 옆집로인한테서 들은것이였지만 이날 아사꼬의 앞에 불쑥 나타난 겐지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바로 자기가 그처럼 타매하던 문부성 과장 이찌로라는 사실만은 명백했다.

아사꼬는 경멸에 찬 시선으로 이찌로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제 애비의 기질을 그대로 닮았구만.…

풀떡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한 아사꼬는 딸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마당가로 나섰다.

얼굴이 푸르딩딩해진 이찌로가 따라섰다. 아사꼬와 결판을 볼 태세였다.

입을 꼭 봉한채 자기의 승용차가 서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아사꼬는 멈춰섰다.

그리고는 따라서는 오가와 이찌로를 향해 나직하나 저력있는 소리로 내쏘았다.

《군〈위안부〉제도가 낳은 호색마귀의 후손 이찌로! 내 말을 똑똑히 들어요. 당신의 아버지 다께모또 겐지는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호색광이고 야만이요.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당신도 저 중국대륙의 남경과 송산전역을 한번 밟아보세요.…》

이찌로는 돌부처처럼 굳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사꼬의 머리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고패쳤다.

이찌로, 너는 겐지라는 썩어 문드러진 독초뿌리에서 돋아난 독초이다! 그런데 이찌로와 같은 독초들이 왜 아직도 일본의 정계와 사회계에 득실거리는가. …그러면 그런 독초들이 과연 어디에서 돋아나는가.… 옳다! 야스구니진쟈에서 돋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스구니진쟈야말로 썩어 문드러진 독초뿌리들이 묻혀있는 군국주의자들의 《터밭》, 국수주의자들의 《터밭》이다! 그 《터밭》에서 이찌로와 같은 우익계의 독초들이 계속 돋아난다. 인류량심의 지탄을 받는 그 저주로운 야스구니진쟈, 콱 무너지라!…

아사꼬의 승용차는 겐지네 집마당을 벗어났다.


×


아사꼬가 히띠에서 돌아온지 나흘만이였다.

《마이니찌신붕》 석간지를 펼쳐들었던 아사꼬는 한동안 움직일줄 몰랐다. 지면에 《전 참의원 의원이며 〈영령보답회〉 고문 다께모또 겐지상 작고》라는 글줄이 실려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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