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대답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본해적떼가 전라도남쪽지방에 침입하였던 사건을 말합니다.
그해가 을묘년이였으므로 그렇게 부릅니다. 명나라 연해일대에서 해적행위를 하다가 돌아가던 일본해적떼의 한 집단이 1555년 5월 11일 70여척의 배를 타고 전라도 령암군 달량포에 침입하였습니다. 적들은 성밖에 사는 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략탈을 감행한 후 달량성을 포위공격해왔습니다. 달량성의 군인들과 인민들은 수량상 우세한 적들과 맞서 3일간이나 용감히 싸웠습니다. 우세한 력량으로 달량성을 강점한 적들은 한동안 이곳에서 로략질을 감행한 다음 5월 21일에는 전라도병영에, 이튿날에는 장흥부에 침입하고 24일 령암성을 공격해왔습니다. 령암성의 군인들과 인민들은 25일 적들과 치렬한 싸움을 벌리였습니다. 날래고 용감한 군인들로 무어진 습격조는 향교에 있는 적지휘부를 들이쳤습니다. 아군의 일제사격에 적장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령암성방위자들은 불화살을 쏘아대면서 적진지에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습니다. 불화살은 때마침 서풍을 타고 날아가 적들에게 불벼락을 들씌웠습니다. 바빠맞은 적들은 도망쳐 저들의 지휘부가 있는 향교안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방어군은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왜적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였습니다. 기가 꺾인 적들은 변변히 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향교전투에서 령암성의 군인들과 인민들은 왜적 104명의 목을 자르고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여 무리로 쓸어눕혔습니다.
령암성전투에서 군인들과 인민들은 모두 200여명의 왜적들을 소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령암성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그후 가리포, 회령포, 록도 등지에 또다시 침입해왔습니다. 이어 왜적들은 금당도에도 기여들었다가 전라도수군의 강력한 타격을 받고 패주하였습니다. 6월 27일에는 1 000명의 왜적이 제주도에 침입하였다가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의 강한 반격을 받고 쫓겨갔습니다. 5월 중순부터 6월 하순까지 조선남해지방의 섬들과 연해에 기여들어 살인과 방화, 략탈을 감행하던 왜적의 무리들은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의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무리죽음을 당하고 쫓겨갔습니다.
을묘왜변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왜적들은 그후 수십년동안 큰 규모의 해적행위와 략탈행위를 감히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김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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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무대로 될수 있는 대지는 로야령이남의 동만땅과 남만지방에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인민혁명군이 왜 자기의 발상지이고 보금자리인 동만을 떠나 유격구해산후의 첫 원정후보지를 북만으로 정하였는가 하는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것은 우선 북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과의 련대성을 강화하고 그들과의 전면적인 협조, 협동, 협력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서였습니다.
동만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 령솔자,주창자의 대부분이 조선사람들이였던것처럼 북부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주동인물들의 대부분도 다름아닌 조선사람들이였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북만의 유격운동을 개척하는데서도 선구적이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런 북만의 동지들이 조선인민혁명군과의 상면을 그처럼 절절하게 갈구하고있었던것입니다. 우리와의 협력을 위하여서뿐아니라 국제당과의 관계,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 중국인민과의 관계,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에게는 해명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많았고 풀어야 할 고충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북만에서 그들대로의 문제때문에 남모르는 고통을 겪고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부터
또한 1차 북만원정을 통하여 이미 그 시초를 열어놓은 북만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적동맹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맞게 그들과의 공동투쟁을 더 잘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반제반전을 지향하는 진보적인류와 사회주의력량의 진출앞에서 당황망조한 제국주의자들은 1930년대중엽에 들어서면서 세계의 자주력량을 반대하는 국제적련합을 강화하고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에서
이런 정세의 요구로부터
박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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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파》나 《엠엘파》는 모두 1920년대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안에 발생한 종파들로서 맑스-레닌주의가 전파되고 로동운동이 급속히 앙양되는 당시의 시대적추세에 따라 공산주의운동에 기여든 행세식맑스주의자들, 소부르죠아인테리들로 이루어진 파쟁집단이였습니다. 이들이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에 끼친 해독은 매우 큽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종파주의자들이 끼친 해독은 매우 크다.》
일반적으로
특히 종파들은
일부 유격구역에서는
일제의 간계에 놀아나 반《민생단》투쟁을 극좌적으로 벌려 수많은
하기에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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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정치는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와 독특한 철학적견해를 가지고 래일에 대한
《음악을 중시하고 음악을 정치의 위력한 수단으로 하여
음악정치는
지난날에는 음악정치라는 말자체가 없었으며 또 음악을 정치와 결합시켜본 정치가,
지난 시기 정치사에 그 말자체가 없었던
오늘 우리의 음악정치는 주체의 사회주의강국건설을 정서적으로 안받침하고있으며 전체 인민들을 문명국건설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데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있습니다.
이처럼
김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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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가들에 의하여
인민대중을 사상적으로 각성시키고 영웅적투쟁에로 고무추동하기 위하여서는 붓대를 중시하고 그 역할을 높여야 합니다.
이처럼
김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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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력사》는
일찌기 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하기에 우리 인민들과 세계 진보적인류는
그리하여 《불멸의 력사》라는 총 표제밑에 우리
총서 《불멸의 력사》의 첫 작품은 장편소설 《1932년》입니다.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우리
총서 《불멸의 력사》의 창작은 로동계급의
우리 나라에서 총서 《불멸의 력사》의 창작은 소설문학에서 새로운 총서형식을 개척한것으로 하여 인류문예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으며 거대한 업적을 이룩한것으로 됩니다.
김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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