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가 왜나라의 문화발전에 준 영향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원래 우리 나라는 일본보다 훨씬 먼저 발전하였으며 일본의 문화도 우리 나라에서 넘어간것입니다.》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발전시킨 발해는 자기 존재의 전기간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리는 과정에 주변나라들에 폭넓은 문화적영향을 주었다.

특히 발해는 727년 9월 왜나라와 국교관계를 맺은 후 925년까지 근 200년간 여러 분야에 걸쳐 왜나라에 적지 않은 문화적영향을 주었다.

발해-왜나라관계는 810년대초를 기준으로 하여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볼수 있다.

전반기에 발해사신은 16차, 왜나라사신은 15차 오고가면서 서로 상대방을 방문하였고 후반기에 발해사신은 18차, 왜나라사신은 1차(실지는 거란방문도중의 체류) 상대방을 방문하였다. 이 과정에 발해는 왜나라의 문화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고대로부터 왜나라의 문명발전에는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 창조적지혜가 깃들어있다. 이때문에 조선계통귀족들은 왜나라의 통일국가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7세기까지 왜나라문화에는 조선적성격과 색채가 짙게 배여있었다.

 

△ 전반기에 발해가 왜나라에 준 문화적영향에서 특징적인것은 선행시기에 마련된 조건에 토대하여 왜나라와 활발한 사신교환과정에 발전된 음악을 적극 전파함으로써 왜나라의 음악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것이다.

ㅡ 전반기에 발해가 준 음악적영향은 우선 730년대말부터 왜나라에서 발해음악과 같은 계통의 음악인 고려악이 매우 중시된데서 찾아볼수 있다.

발해의 영향을 받기 전에 왜나라에서는 백제계통귀족들이 큰 세력을 이루고있었기때문에 백제음악이 중요시되고있었다. 731년 왜나라의 아악료에 배치된 조선계통악생들가운데서 백제악생이 26명(《속일본기》 권11 성무기 천평 3년 7월 을해)으로서 가장 많았던것은 그러한 단편적인 실례이다.

그러나 발해와의 국교수립후에는 고려악이 더 중요시되기 시작하였다. 제2차 발해사신 기진몽일행이 왜나라수도에 도착한 739년 10월 왜나라왕궁의 불교행사에서는 고구려사람들의 후손들에 의하여 고려악이 온종일 연주(《만연집》 권5 노래번호 1594 부처앞의 노래 한수)되였다. 특히 740년 1월 기진몽일행은 왜나라왕궁에서 처음으로 발해음악을 연주(《속일본기》 권13 성무기 천평 12년 정월 정사)함으로써 같은 계통의 음악인 고려악이 더 활발히 보급되도록 하였다. 이들이 귀국한 이듬해인 741년 7월 왜나라의 새 수도 야마시로의 구니경에 새로 건설된 왕궁의 연회에서는 고려악에 맞추어 왜나라의 녀성무용수들이 가무를 공연(《속일본기》 권14 13년 7월 신유)하였다. 뿐만아니라 749년 12월말 왜나라 동대사에서 통치자와 왕실귀족들, 문무관료들, 지방호족들과 5 000명의 승려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진행된 불교행사에서는 당나라음악과 함께 조선계통음악도 연주되였다. 이때 연주된 조선계통음악에 대하여 사료에는 《발해음악》(渤海樂)이라고 기록(《속일본기》 권17 천평승보 원년 12월 정해)되여있다. 이것은 이 시기에 중요시된 고려악이 발해음악과 같은 계통의 음악임을 보여준다.

ㅡ 발해의 음악적영향은 또한 발해음악이 호상간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760년대에 왜나라에 광범히 보급전파된데서 찾아볼수 있다.

763년 1월 왕신복일행은 왜나라왕궁에서 음악을 연주(《속일본기》 권24 순인기 천평보자 7년 정월 경신)하였다. 발해사신뿐아니라 고구려유민의 후손인 고노 우찌유미(高內弓)도 왜나라류학생으로서 모국에 와서 음악을 배워가지고 이해에 귀국(《속일본기》 권32 광인기 보구 4년 6월 병신, 순인기 천평보자 7년 10월 을해)하였다. 류학생들은 발해에 오래동안 머무르면서 발해사람들의 정서적감정을 더 깊이 파악할수 있었을것이다.

767년 10월을 비롯한 여러 계기들에 궁삭사와 왜나라왕궁에서 있은 불교행사들에서는 고려악이 연주되였고 769년 왜나라에서 고려악을 해설한 책인 《해악당고려악》이 출판(《녕락유문》 중권 도꼬당출판, 1965년, 411페지)되였다.

이러한 사실은 760년대에 발해가 자기 사신과 왜나라류학생들을 통하여 왜나라의 음악발전에 특별히 큰 영향을 주었다는것을 보여준다.

ㅡ 발해의 음악적영향은 또한 왜나라정부가 고려악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대책을 취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777년 5월 발해사신 사도몽일행은 왜나라궁정에서 음악을 연주(《속일본기》 권34 광인기 보구 8년 5월 정사)하였다.

발해의 음악적영향을 받아 왜나라의 고려악은 더 널리 보급되였다.

780년 왜나라의 서대사에는 769년에 간행된 고려악해설도서와 고려악을 연주, 공연하는데 필요한 악기와 소도구, 의상들이 있었다.(《녕락유문》 중권 도꼬당출판, 1965년, 411, 426, 427페지)

801년 11월 이세노구니(미에현의 중부)의 다도사에는 786년에 이 지방의 장관 기노 사바마로를 비롯한 관리들이 기증한 가무공연용 백색소도구인 고려견 1개와 고려모자 2개가 있었다.(《일본의 고문서》(하) 이와나미서점, 1962년 43, 45페지)

이것은 발해음악이 왜나라의 궁중뿐아니라 여러지방에 보급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전반기에 왜나라의 궁중에서는 백제, 신라, 당나라, 림읍(윁남) 등 여러 나라 음악들이 연주되였다. 그러나 해당 나라 사람이 직접 연주하고 왜나라사람들이 해당 나라에서 류학하면서 배워다가 자기 나라에 보급시킨 음악, 다시말하여 호상간의 래왕속에서 활발히 보급전파된 음악은 발해음악밖에 없었다.

△ 발해는 후반기에도 문학, 공예, 천문학, 불교, 음악무용 등 여러분야에 걸쳐 왜나라에 폭넓은 문화적영향을 주었다.

ㅡ 후반기 발해의 문화적영향은 우선 재능있는 문인들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왜나라의 문화발전에 도움을 준것이다.

발해는 후반기에 왕효렴, 승려 인정(814년), 승려 정소(825년), 왕문구(821, 827, 848년), 주원백(859년), 려거정(861년), 양성규, 리흥성(871년), 배정(882, 894년), 배구(908, 919년) 등 재능있고 명망높은 학자, 문인들을 왜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왜나라방문기간 문인관리들과 접촉하면서 높은 수준에 오른 발해문학의 발전면모를 과시하였다.

후반기에 맨 처음 왜나라를 방문한 왕효렴은 자연경치와 인간의 정서적감정을 시적으로 잘 묘사할줄 아는 훌륭한 문인이였다.

그는 《봄비》, 《산꽃》, 《달을 보고 고향을 그리며》, 《이즈모주에서》 등 여러편의 시를 지어 이역땅에서 자연경치를 감상하면서도 나서자란 고향을 못견디게 그리는 서정적감정을 절절히 노래하였다.(《문화수려집》 상) 

그의 시들은 당시 왜나라문인들속에서 커다란 감흥을 자아냈다.

815년 왜나라승려 구까이는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시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읊어보면서 매우 기뻐하였다고 하면서 왕효렴의 방문소식을 뒤늦게 알게 되여 만날수 없는것을 매우 아쉽게 여겼는데 마침 인편이 있어 편지로나마 자기의 심정을 알릴수 있게 되였으니 못내 다행스럽다고 하였다.(《고야잡필집》 치발해사왕효렴서)

발해의 승려 정소도 시와 산문에 능한 문장가로서 왜나라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그는 828년 4월 당나라에 갔다가 이미 친교가 있던 왜나라승려 레이센이 오대산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자 고인을 조상하는 시와 서(산문의 한 형식)를 지어 오대산의 칠불교계원(사찰이름)에 남겼다. 이 글에 애도감이 얼마나 절절히 표현되여있었는지 오대산승려들은 그것을 널판에 써서 사찰벽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그후 840년 7월 그곳에 들린 일본승려 엔닌은 그 글을 베껴가지고 돌아가 당나라려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수록(《입당구법순례행기》 권3 개성 5년 7월 3일)하였다.

비상한 시적재능으로 하여 왜나라문인관리들의 존경과 찬탄을 불러일으킨것은 발해사신 배정이였다.

883년 5월 박식가, 문장가로 알려진 수가와라노 미찌자네는 배정이 《잠간사이에 시 한수를 지어내는 재간》을 가진 시인이기때문에 여느 자리에서는 그의 시를 받아볼수 없다고 하면서 홍려관에서 연회를 차리고 시짓는 모임을 마련하군 하였다. 배정이 초고도 없이 단숨에 지어준 5언시와 7언시, 6운시, 4운시(《관가문초》 권7 홍려증답시서)들에 대하여 왜나라에서 《시문학의 거장》으로 불리우던 시마다노 다다오미는 《서리발칼날이 날카롭게 끝을 번뜩이며 적을 찌르는듯한》풍격을 갖춘 《진귀한 보물》로. 배정의 시적재능을 《번개쫓듯 재빨리 문장을 짓는》 재주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배정을 《재주많은것은 실로 마음붉은 사신이건만 젊고 건장함은 오히려 얼굴 흰 사나이》라고 하면서 그가 30대의 청년으로서 고령의 문인들과 같은 문장재주를 갖춘데 대하여 감탄(《전씨가집》 권중 계화발해배대사견작관시랑기전객행자시, 적배대사답시)하였다. 배정은 10여일간에 왜나라관리들과 무려 59수의 시를 주고받았다고 한다.(《관가문초》 권7 홍려증답시서)

배정의 비상한 재능과 름름한 풍채에 탄복한 왜나라통치자 양성은 그에게 자기의 옷 1벌을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왜나라문인들이 발해사신들과 주고받은 시와 산문들은 《본조문수》, 《릉운집》, 《부상집》, 《강담초》, 《전씨가집》, 《도씨문집》, 《관가문초》, 《홍법대사전집》, 《홍법대사편조발휘성령집》, 《고야잡필집》 등 여러 시문집들과 개인문집들에 남아있다. 거기에는 발해사신들의 재치있는 문학적재능과 그에 대한 아낌없는 찬사가 그대로 반영되여있다. 

이상의 사실들은 발해사신들이 왜나라의 문학발전에 미친 영향이 일본의 고전문학작품집들과 함께 오늘까지 전해지고있으며 그것은 발해의 문화적영향가운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ㅡ 후반기 발해가 왜나라에 준 문화적영향은 또한 우수한 수공업가공기술과 공예술을 전파시킨것이다.

발해사신들이 왜나라의 각이한 계층을 상대하여 진행한 사적인 무역에서는 털가죽가공제품들과 공예품들이 많이 교역되였으며 그 과정에 발해의 우수한 수공업가공기술과 공예술이 전파되여 아낌없는 찬사를 받군 하였다.

871년 5월 왜나라통치자 청화를 대신하여 양성규에게 감사장을 쓴 미야꼬노 요시까는 발해의 돈가죽옷과 사향, 검은빛털가죽신발을 《얻기 힘든 이역의 물건》이라고 하였다.(《도씨문집》 권4 사발해양대사증초구사향암모화장)

877년 6월 양중원이 가져간 진완(보석완구)과 대모술잔을 본 왜나라측 통역관 가스가노 야께나리는 《옛날에 당나라에 가서 진귀한 보물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기묘한것은 없었다.》고 감탄하였다.(《일본삼대실록》 권31 양성 원경 원년 6월 25일)

왜나라의 귀족관료들속에서는 발해사신들이 가져간 돈가죽을 비롯한 털가죽가공제품들을 숭배하는 풍조가 지배하고 돈가죽옷의 류행이 범람하여 한때 금지하는 조치까지 취해진적이 있었다고 한다.

ㅡ 후반기 발해가 왜나라에 준 영향은 다음으로 왜나라의 천문학과 력법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준것이다.

859년 발해사신 오효신은 《선명력》이라는 천문력서를 일본에 가져다주었다. 왜나라의 음양료(천문관측담당관청)관리들은 이 력서를 가지고 천문을 관측하기도 하고 시간을 측정하기도 하면서 그 정확성정도를 따져보고나서 이전에 쓰던 《태연력》과 《오기력》을 그만두고 《선명력》만 사용할것을 정부에 제기하였다.(《일본삼대실록》 권5 청화 정관 3년 6월 16일)

이 력서는 861년 6월 16일부터 1684년 3월 3일 《대통력》사용전까지 근 823년동안 쓰이였다. 877년 7월이후에는 력서작성에서 《태연력》도 함께 참고하였으나 날자를 맞추는것은 《선명력》에만 의거하였다.

《선명력》은 왜나라의 천문학과 력법, 사회생활발전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후세의 력사가들이 이 력서사용기간을 《선명력시대》라고 부르고 그 전달을 《력사기록상의 일대 기념사》로, 발해사신이 《일본문화에 미친 최대의 공헌》이라고 하는것은 결코 과장된 평가가 아니다.

ㅡ 후반기 발해가 왜나라에 준 영향은 또한 중세왜나라의 불교전파에 영향을 준것이다.

814년 왜나라에 간 왕효렴의 일행에는 특사로 승려 인정이, 825년 고승조일행에도 승려 정소가 들어있었다. 정소는 당나라 오대산에서 불교를 연구하던 일본승려 레이센의 부탁을 받고 1만개의 사리(《부처의 뼈》)와 새로 번역된 불경(신경) 2부 등을 왜나라에 전달해주었다. 847년 당나라의 불교관계대상들을 순례하고 귀국한 일본승려 엔닌은 오대산에서 베껴간 불교관계 도서목록인 《천대지자대사교적등목록》(1권)을 《승려 정소가 습득한것》이라고 특별히 밝혀놓았다.(《입당구법순례행기교주》 화산문예출판사 1992년, 578~579페지) 861년 4월 발해사신 리거정은 싼스크리어트어(옛 인디아어)로 씌여진 밀교계통의 불경인 《불정존승타라니경》을 왜나라에 가져다주었다. 이것은 지금도 일본 석탄사의 《교창성교》 제25함속에 들어있다고 한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발해는 일본에 근 200년간 여러 분야에 걸쳐 폭넓은 문화적영향을 주었다.

발해는 그 과정에 고구려를 계승한 선진문명국의 발전면모를 깊이 인식시키고 일본의 중세력사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조선중세대외관계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하였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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